우리의 펑퍼짐한 아줌마…나의 사랑, 줄리엣 비노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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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오동진의 여배우 열전 - 줄리엣 비노쉬줄리엣 비노쉬는 여배우라기보다는 아줌마이다. 그냥 아줌마. 펑퍼짐한 아줌마. 근데 이상하게도 그게 더 매력이 있다. 자연미가 넘치고 늙어가는 것에 대해 자부심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열패감 따위는 없다. 인생이란 그런 것, 산다는 건 이런 것이란 느낌으로 남들이 쉽게 가지지 못하는 자족감 같은 것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럽다. 이 펑퍼짐한 만족감.한국에서 유난히 잘된 ‘프렌치 수프’에서도 그랬다. 처음 이 영화를 볼 때 1800년대 여성 외제니의 실내복은 비노쉬의 살찐 허리를 감춰 주기에 적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비노쉬는 이 영화에서 두어 번 벗고 나온다. 외제니는 옷을 홀라당 벗고 침대에 누워 등을 돌리고 잔다. 근데 그 곡선미가 아찔하다. 펑퍼짐한 허리와 둔부 선이 섹시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외제니가 잠들어 있을 때 동거 중인 남자 요리사이자 미식가인 도댕(브누아 마지멜)은 그녀의 등 뒤에 앉아 벗은 몸을 한번 쓰윽 훑으며 쓰다듬는다. 그 손길에는 어떤 섹스신이나 베드신보다 더한 뜨거운 욕망이 담겨 있다. 영화 ‘프렌치 수프’의 가장 좋은 장면은 요리를 만드는 씬이나 그것을 먹는 모습이 아니다. 줄리엣 비노쉬의 늙었지만 아름다운 육체의 곡선이 드러날 때이다. 우리 중 상당수는 여전히 줄리엣 비노쉬를 사랑하고 소유하고 싶어 한다. 그녀의 나이 60이다.이제는 ‘퐁네프의 연인들’의 줄리엣 비노쉬를 논하지 말자.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그때의 비노쉬를 자꾸 얘기하는 건 상대역으로 나왔던 드니 라방이 얼마나 늙고 추해졌는지를 비교, 목격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드니 라방이 십수 년 전 한국에 왔을 때 우연히 합석하게 된 프라이빗한 자리에서 자신이 한동안 약물에 취해 살았고 잠깐 감옥에 들어갔다 왔다고 말했을 때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단아하고도 지적인 미모
그에 걸맞은 연기력을 갖춘 명배우
세월이 지나 늙는다 해도
아름다운 배우, 줄리엣 비노쉬
오 우리의 퐁네프 다리의 연인이여. 드니 라방은 망가지고 지금은 한낱 조연배우로 만족하고 살지만(2022년에 나온 독특한 영화 ‘가가린’에서 드니 라방은 고물 같은 이미지의 고물상 주인으로 잠깐 나온다.) 퐁네프의 다른 연인 줄리엣은 굳건히, 그리고 올바르게, 무엇보다 비범한 평범함으로 아니 펑퍼짐함으로 스타 자리를 지켜 왔다. 줄리엣 비노쉬가 드니 라방 마냥 무너졌다면 프랑스 영화계가 부서졌을 것이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추락했을 것이며 세계 평화도 위기에 직면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실망과 좌절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사람들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무슨 멜로 영화 제목 같은 ‘천 번의 굿나잇’(2014)같은 영화는 줄리엣 비노쉬가 아니면 주인공 역을 맡을 배우가 없었을 작품이다. ‘천 번의 굿나잇’의 레베카는 분쟁지역 전문 사진기자이다. 그녀가 다니는 전쟁 지역은 아프가니스탄일 수도, 시리아일 수도, 레바논일 수도, 가자 지구일 수도 있다.이 영화는 지금 이스라엘 때문에 3만명이 한꺼번에 죽었다는 레바논 폭격 지역을 생각하며 다시 보면 좋은 영화이다. 사진 기자 레베카는 딸아이 둘과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 마커스(니콜라이 코스터 왈도)를 자꾸 떠나 위험한 지역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녀는 어떻게 보면 죽음 중독자이다. 자신이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잘 안다. 영화의 초입부에 그녀는 옆에서 터진 폭탄 테러 때문에 죽었다 살아난다. 그런데도 그녀는 다시, 또다시, 중동으로 가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목격한 참상들, 특히 죽어가는 어린이들의 눈동자를 잊지 못한다. 그녀는 극심한 우울증이자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중이다. 영화는 비극적이고 슬프지만 차분하다. 영화를 보면서 차분하게, 줄줄, 눈물을 흘리게 한다. 줄리엣 비노쉬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참혹한 세상을 응시하거나 그걸 기억하는 표정 또한 차분하다. 그녀는 사람들을 그렇게 울릴 줄을 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 영화를 줄리엣 비노쉬 영화의 베스트 중 하나로 꼽는 이유이다.물론 줄리엣 비노쉬는 사람들을 펑펑 울리게 하느라 자신도 펑펑 우는 연기를 한다. 그녀의 최고작은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1997년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이다. 그녀에게 이 영화 이상의 톱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 이상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밍겔라 감독 자신 한 명뿐인데 이미 그는 죽었기 때문이다. 밍겔라는 54세에 죽었다. 천재는 대체로 일찍 죽는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비노쉬는 간호사 한나 역을 맡아 영국인 화상 환자를 치료한다. 그녀는 헌신적이다. 혼신의 힘을 다한다. 한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간호사는 자신의 환자를 정말 사랑하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인간적으로든 사명감으로든 종교적으로든 인류애 차원이든, 왓에버(whatever) 그렇다. 그건 매우 고래(古來)의 일 같은 것인데 그 옛날 ‘무기여 잘 있거라’의 게리 쿠퍼와 헬렌 헤이스 커플도 그랬고(1932년 판) 록 허드슨과 제니퍼 존스 커플 때도 그랬다(1957년 판).간호사는 어쨌든 자신의 환자를 사랑한다. 한나는 전투기가 추락해서 전신 화상을 입고 죽어가는 영국인 환자(그러나 독일군에 기밀을 팔아먹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것 때문에 첩보요원 데이빗 카라바조, 윌렘 대포는 손가락이 다 잘리는 고문을 받았으며 그래서 그는 이 환자를 죽이려 한다.) 알마시(랄프 파인즈)를 일대일로 간호한다. 생명이 경각이기 때문이다. 알마시는 야전병원을 전전하며 실낱 같은생명을 이어오는 중이다.연합군은 프랑스 남부 전선 어딘가에서 밀리고 한나는 퇴각하는 부대를 떠나보내고 적진 후방에 남는다. 이 환자를 두고 같이 퇴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 부서진 성안에 들어가 병실을 차린다. 무너져 내린 계단을 남겨진 양장본 책으로 이어서 새로 만들기도 한다. 그녀는 밤이고 낮이고 환자를 돌본다. 외롭고 무서울 텐데 오히려 환자 때문에 다 괜찮다는 표정이다.
그녀는 환자에게 책을 읽어 주고 더듬더듬 그의 과거사를 듣는다. 어느 날 알마시는 화상으로 뭉툭해진 손으로 침대 옆 탁자의 모르핀을 하나, 둘, 셋, 넷 하며 한나 앞으로 밀어낸다. 이 모르핀을 모두 한꺼번에 놔 달라고. 이제 그만 세상이 자기를 놔주게 도와 달라고. 한나는 알마시의 말 못 하는 말을 단박에 이해한다. 한나는 모르핀 주사액을 손안에 쥐고 왈칵 울음을 터뜨린다. ‘잉글리쉬 페이선트’의 이 장면은 영화가 어떤 배우에 의해 연기되느냐에 따라 얼마나 그 예술성의 퀄리티가 달라질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비노쉬가 왈칵 울음을 터뜨릴 때 많은 사람은 펑펑 울었다. 이 장면은 『오동진의, 당신이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명장면 101』에 수록될 것이다.줄리엣 비노쉬는 왕성해서 좋은 영화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영화를 잘 고르기 때문에 왕성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2019년의 ‘논픽션’ 같은 작품, 2018년의 ‘렛 더 선샤인 인’ 같은 작품이 그렇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논픽션’은 4명의 지식인 커플들이 얽히고설키는 혼외정사 얘기이다. 딴 여자 셀레나(줄리엣 비노쉬)하고 잔 남자 레오나르(뱅상 멕켄)를 여자(노라 함자오위)는 받아들이고 여자는 헤어지려 했던 그 남자의 아이를 갖는다.
그 남자하고 잔 딴 여자는 남편(기욤 까네)이 있고 아이까지 있으며 남편과 그 남자는 친구 사이이다. 그걸 남자는 또 받아들인다. 개판이다. 마치 지금의 신성(시 하고 있는 봉건 잔재의 자본주의적) 가족을 해체하고 새로운 가족과 새로운 사랑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얘기처럼 들린다. 매우 프랑스적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가족이나 부부, 커플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에 대한 급진적인 해체와 붕괴 없이 지금의 사회를 고칠 방도는 없어 보이기는 한다. ‘논픽션’에서 줄리엣 비노쉬는 스타 여배우 셀레나 역을 맡는다.원작에 비해 완성도가 다소 떨어져 보이는 2017년 영화 ‘공각기동대’에서 비노쉬는 인공지능 박사 오우레로 나온다. 그녀는 섹션 8의 특수요원인 메이저(소령. 스칼렛 요한슨)를 만들고, 고치고, 정 안되면 폐기하고 새로 만들고 하는 일을 한다. 오우레 박사는 메이저를 자기 딸로 생각한다. 오우레가 자신의 과거 생의 비밀을 삭제한 것을 알게 된 메이저는 그녀에게 총을 들이대며 배신감에 치를 떤다.
그래서 그러려고 했던 것이 아닌데 메이저가 자신을 원망하는 것을 보고 박사는 어쩔 줄 몰라 한다. 엄마는 이상하게도 아이에게 늘 죄책감을 느끼는 법이다. ‘공각기동대’에서는 비노쉬의 그 모성 연기가 좋다. 무슨 일인지 이 영화에서 줄리엣 비노쉬는 날씬하다. 스타일 있는 박사의 외모로 나온다.비노쉬의 영화는 70편이 가깝다. 다 얘기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루이 말의 ‘데미지’(1994)를 얘기 안 한다며 당신이 평론가 맞느냐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필립 카우프먼의 ‘프라하의 봄’(1989)은 빼먹으면 안 된다고 아우성을 칠 것이다. 또 혹자는 크쥐시토프 키엡슬롭스키 발음도 잘 안되면서 ‘세 가지 색 : 블루’(1993)를 잊을 수 없어 할 것이다. 요즘 강아지 영화만 찍는 라쎄 할스트롬의 2001년작 "‘초콜릿’은 얘기 안 하고?"라 할 것이다.아휴 참. 왜? 그럼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도 얘기해야지. 아니다. 아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죽기 전 비노쉬를 만나 만든 ‘사랑을 카피하다’(2011)를 써야 한다. 늙은 연인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늙었기 때문이며 늙은이들도 사랑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아 원고가 너무 길어진다. 지면이 부족하다. 여배우 열전으로 쓰기에 줄리엣 비노쉬는 할 말이 너무 많은 배우이다.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