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한국 작가, 아시아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

여성작가로는 18번째, 한국 작가 최초 노벨문학상
'한국의 카프카'로 불리며 장편, 단편, 시 넘나들어

보편적 주제인 '폭력', 서정적 언어로 담은 작품세계
한림원 "역사적 트라우마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

2016년 영국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2023년 프랑스 메디치상 수상 등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이어 두 번째 노벨상
소설가 한강(53)이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동안 고은 시인, 황석영 소설가 등이 후보로 거론됐지만 수상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인의 노벨상 수상은 24년 전인 2000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이후 두 번째다. 봉준호 감독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BTS의 빌보드 1위, ‘오징어 게임’의 에미상 6관왕 등 K콘텐츠가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가운데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K콘텐츠의 저력’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문학은 폭력 반대편에 서는 것"이라고 말하는 소설가, 한강 (아티스트 DB)
노벨 문학상 수상한 소설가 한강 / 사진제공. Roberto Ricciuti
스웨덴 한림원은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 소설가 한강에게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여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한림원은 한강의 작품 세계를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표현하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어 “한강은 자신의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고, 각 작품에서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한다”며 “그는 신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갖고 있으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됐다”고 설명했다.

한림원은 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등의 소설을 거론하며 “한강 작품은 동양적 사고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 사이의 대응인 고통의 이중 노출이 특징”이라고 했다.
스웨덴 공학한림원 노벨상 홈페이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누구도 예상 못한 ‘깜짝 수상’이다. 발표 전까지 영국 유명 온라인 베팅사이트 나이서오즈에서 호주의 제럴드 머네인과 중국의 찬쉐가 유력 후보 1위와 2위를 차지했다. 후보로 거론된 26명의 작가 중 한강의 이름은 없었다. 민음사와 문학동네 등 국내 출판사들이 예상한 후보에도 한강은 없었다.미국 뉴욕타임스는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놀라운 일”이라며 소식을 전했다. 마츠 말름 한림원 상임 사무국장은 기자회견에서 “수상자와 전화 통화했다”며 “한강은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고, 아들과 저녁을 막 마친 것 같았다”고 했다.
노벨 문학상에 소설가 한강…한국 작가 최초 수상 쾌거
"5·18은 가족 모두의 죄책감이었다" …한강의 작품세계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54)의 대표작 <채식주의자>는 이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영혜는 어느 날 ‘꿈을 꿨다’면서 채식을 시작한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남편과 언니로부터 ‘비정상인’ 취급받는다. 결국 영혜는 이혼 소송을 당하고 가족에 의해 정신병원 입원 수속을 밟는다.

한강의 소설은 난해하다. 비주류인 인물들의 시각을 대변하는 듯한 그의 작품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여운이 길다. 인간의 상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소외당한 자들을 보듬으려는 희망을 전하기 때문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한 작가의 수상 이유로 “역사의 트라우마에 맞서는 동시에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인 산문”이란 평가를 한 이유다.

1970년생인 작가는 광주광역시에서 자랐다. 자서전 성격의 소설 <몽고반점>에서 한강은 자신의 어머니가 임신 중에 몸이 안 좋아 다량의 약을 먹었던 것으로 묘사했다. 열 살 때 가족이 서울 수유리로 이사한 이후로 계속 서울에서 살고 있다.서울 안국동에 있었던 풍문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그의 집은 문인들로 가득했다. 아버지는 소설가 한승원(84).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든 장편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으로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김동리문학상 같은 문학상을 거머쥔 원로 작가다. 오빠(한동림)와 남동생(한강인)도 소설을 썼다.

한강은 1993년 대학을 졸업하고 잡지 <샘터>에서 기자로 근무하면서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서울의 겨울’ 등 시 4편을 실으며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다. 소설가는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붉은 닻>으로 당선의 영광을 안으며 시작했다.
노벨 문학상에 소설가 한강…한국 작가 최초 수상 쾌거
한강은 지침없이 글을 썼고,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상을 받았다. 1995년 첫 단편소설집 <여수>를 펴낸 이후 두 권의 단편소설집을 더 냈다. <아기 부처> <바람이 분다> <인간이 온다> 등으로 한국소설상,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김유정 문학상, 삼성호암상을 받았다.

한 작가의 작품은 비서구권, 여성, 소수자 등 비주류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1980년대 암흑 같은 터널길을 걸어온 고향 광주가 그중 하나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은 영혼들의 말을 대신 전하는 듯한 문장을 풀어낸 <소년이 온다>(2014)로 2017년 이탈리아 최고 권위의 상인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받았다.

그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장편 <채식주의자>(2017)부터다. 지난 2016년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상을 받으면서다. 부커상의 전신인 맨부커상 선정위원회는 이 작품을 두고 “불안하고 난감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이라며 “현대 한국에 관한 소설이자 수치와 욕망,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불안정한 시도에 관한 소설”이라고 평가했다.
한강 작가의 가족 사진.
<작별하지 않는다>(2021)는 제주 4·3사건의 비극을 세 여성의 시선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프랑스 4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메디치상을 작가한테 지난해 안겨준 작품이다. 작가가 1990년대 후반 제주 바닷가에 월세방을 얻어 지내던 동안 취재한 주민의 회고록에 기반해 썼다.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상흔을 다룬다는 점에서 <소년이 온다>와 짝을 이룬다.

이처럼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소수자성’이 주요 화두가 된 최근 문화예술계의 트렌드와도 맞닿아 있다. 지난 4월 세계 최고의 국제미술전인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황금사자상이 뉴질랜드의 원주민 작가그룹 ‘마타나흐 컬렉티브’한테 돌아간 것이 단적인 예다.

한 작가는 장편뿐 아니라 단편, 소설집, 시집을 오가며 작품을 펴냈다. 장편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도 함께 눈여겨볼 만하다. 작가는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리문학상, 이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한국소설문학상 등 국내 문학상도 여럿 수상했다.
노벨 문학상에 소설가 한강…한국 작가 최초 수상 쾌거
"강렬한 시적 산문" …외신들, 극찬 쏟아져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일본 유럽 등 각지에서 속보가 이어졌다. AP통신은 “노벨문학상은 오랫동안 유럽과 북미 지역 작가에 치중해 왔다는 비판을 받았다”며 “지금까지 수상자 119명 가운데 여성은 17명에 불과했다”고 꼬집었다. 한강 작가의 수상이 모든 것을 뒤집는 결과였음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AP는 한강을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을 썼다”고 소개했다. 이어 2016년 한강이 육식을 거부하는 여성을 그린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덧붙였다. 또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과 황동혁 감독의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을 함께 거론하며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한국 문화의 국제적 위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로이터통신은 “한국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최초”라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한강 작가의 아버지 역시 유명한 소설가며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예술에 열정을 쏟은 배경이 문학 전반에 반영됐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한강 작가가 한국에서 선구자로 칭송받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으며, 영국 가디언지는 한강 작가가 맨부커상을 수상한 직후 <채식주의자>를 두고 나눈 인터뷰를 다시 소개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상 기대를 내비친 일본 언론도 한강의 수상 소식을 긴급히 전했다. 교도통신과 아사히신문은 여성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통산 18번째며 아시아인 여성으로는 한강이 처음 수상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일본은 30년 전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뉴스 보는 시민들
한강의 역주행…실시간 베스트셀러 1~10위 독주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이후 한강의 책을 사려는 주문이 폭주하면서 교보문고와 예스24 등 대형 서점들의 홈페이지가 한때 마비됐다. 이들 홈페이지의 실시간 베스트셀러는 1~10위가 모두 한강의 책들로 채워졌다.
10일 출판업계에 따르면 이날 오후 8시쯤 한강 노벨문학상 뉴스가 전해지자마자 주문이 몰려들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웹사이트 접속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아 책을 살 수가 없다는 불만이 접수됐다”고 전했다. 현재는 인터넷이 되더라도 주문이 어렵다. 국내 최대 서점을 자랑하는 교보문고조차 재고가 없기 때문이다. 교보문고는 한강의 수상을 예상하지 못해 주문을 받을 수가 없어 창비나 문학동네 같은 출판사에 급히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 도서판매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예스24도 인터넷 지연 불만이 들어왔다. 예스24 역시 한강의 책들이 빠르게 팔려나가며 품절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채식주의자> 등이 대부분의 책들에 예약판매 로고가 달려 배송을 빠르게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실시간 베스트셀러는 한강의 책들로 도배가 됐다. 두 대형 서점들의 1위는 모두 노벨문학상을 받은 <채식주의자>였다. 교보문고의 경우 2위는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희랍어 시간> <흰> 등의 순이었다. 한강이 2013년 발간한 첫 번째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도 6위에 올랐다. 20위권 안에 한강의 책이 아닌 도서들은 4권에 불과했다.
노벨 문학상에 소설가 한강…한국 작가 최초 수상 쾌거
"한국 문학계의 쾌거…세계의 중심에 서다"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각계에서 "한국 문학계의 쾌거"라는 반응이 나온다.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회의 참석차 라오스를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대한민국 문학사상 위대한 업적이자 온 국민이 기뻐할 국가적 경사"라며 "앞으로도 훌륭한 작품으로 전 세계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시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이근혜 문학과지성사 편집장은 "매년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기대했지만, 예상보다 빨리 좋은 소식을 듣고 벅차올랐다"며 크게 기뻐했다. 그러면서 "한강 작가는 등단 초기부터 우리나라의 아픈 근현대사 속 개인의 아픔과 고통을 섬세하면서도 단단한 문체로 그린 작가"라고 평가했다. 이번 수상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어, 한강 작가의 작품이 한국을 넘어 동시대의 다른 언어권의 독자들에게도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 문학의 위상이 높아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퍼지고 있다. 윤철호 대한출판문화협회장은 "불의한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이룩한 한국 역사를 예술적으로 담아낸 점을 높게 평가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어가 세계에서 주류 언어가 아니라고 해서 우리가 이룬 문학적 업적이 뒤지는 건 아니다"라며 "우리 대중문화처럼 한국 문학도 세계 시장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더 많은 한국 작가들이 주목받고, 출판업계도 세계 시장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활력소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과리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는 "한강은 한국의 사회·역사적인 문제와 자신만의 문학적 개성을 접합시킨 독특한 문학 세계를 만들기 위해 굉장히 노력해온 작가"라며 "이번 수상을 계기로 한국 문학계의 위상도 더 높아질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깜짝 수상? 한국 문학의 황금시대, 이제 시작이다

그때도 한강이었다. 2016년 한강 소설가가 장편소설 <채식주의자>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한 후 변방에 머물렀던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외국 책의 국내 출간과 한국 책의 해외 출간을 돕는 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는 “한강의 부커상 수상 이후 외국에서 한국 책을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며 “지금은 한국 소설이나 에세이 등이 세계 무대에서 당당히 K콘텐츠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에 한국 작가가 이름을 올리는 일은 이제 흔한 일이 됐다. 2018년 한강의 <휜>, 2019년 황석영의 <해질 무렵>, 2022년 정보라의 <저주 토끼>외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이 올랐다. 2023년엔 천명관의 <고래>, 올해는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가 각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아깝게 수상을 놓쳤다.

이밖에 2022년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이 영국추리작가협회(CWA)에서 주는 대거상 번역추리소설 부문을, 2020년 손원평의 <아몬드>가 일본 서점 대상 번역소설 부문을 수상하는 등 한국 문학의 위상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상업적 성공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에 따르면 지난 5년간 해외에서 팔린 한국 문학 작품은 185만부에 달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K팝을 넘어 K힐링 서적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전했다. 이달 미국과 영국에서 출간된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출간을 앞둔 <공방의 계절> 같은 소설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영화와 드라마, 클래식, 대중음악, 미술, 음식 등 K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것과 무관치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글로벌 뉴스 통신사인 AP는 “한강의 노벨문학상은 수상 점점 커지고 있는 한국 문화의 세계적 영향력을 반영한다”며 앞서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오스카상을 받았고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도 성공을 거뒀으며 그룹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 등 K팝 그룹도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다고 짚었다.

임근호·신연수·안시욱·구교범·박종서·이해원·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