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로탕'이 선택한 작가 김훈규 "결국은 이게 우리 삶이라는 것을 담고 싶었다"

[이진섭의 음미(美)하다]

'프리즈 런던 2024' Beyond the Scene #1 [작가]
작가 김훈규

'페로탕' 합류 후 선보인 모든 작품 팔려
내년에 '페로탕 서울'에서 개인전 개최 예정

매일 10시간 이상 치열하게 작업에 몰두
런던에서 청소부 등 여러 굳은 일 경험한 것이 작업에 도움
작품으로 증명하는 것이 예술가로서의 내 소명
[Beyond the Scene #1]

전 세계적인 아트페어 프리즈(Frieze)의 본토이자, 컨템포러리 아트의 성지 런던을 찾았다. 런던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작가를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화이트큐브 등 유수 갤러리들의 문을 두드려 예술계 이야기를 직접 듣고, 크리스티, 필립스 등 전통 있는 옥션하우스를 방문해 시장의 생생한 상황을 몸소 체감하는 게 목적이었다.작가의 품에서 태어난 예술 작품이 갤러리와 아트페어 등의 1차 시장에서 거래되고, 또 컬렉터들의 리그인 옥션하우스 즉 2차 시장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예술 작품이 고객(컬렉터, 구매자 등)에게 전달되는지, 그 여정 지도를 쉽게 엮어보고 싶었다. 런던에 오기 3개월 전부터 시간과 공을 들여 ‘예술이 고객에게 전달되는 여정 지도’를 어떻게 기획할지 고민하던 중 런던에 둥지를 트고, 활동하는 범상치 않은 작가가 레이더에 잡혔다.


만화와 신화가 공존하는 마티에르
보스와 브뤼헐의 현재 진행형, 작가 김훈규
작품 <Into the Blue> 앞에 선 김훈규 작가 / 사진. © 이진섭
3년 전부터 김훈규 작가와 인터뷰하고 싶었다. 그의 그림을 처음 접하면 놀랍고, 다시 접하면 그 세계에서 쉽게 헤어 나오기 힘들다. 2023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전시했던 작품 <목숨 건 결혼식과 쥐들의 왕>(2021 , 비단에 채색, 141×101cm)이나 <습지행 급행열차>( 2022, 비단에 채색, 115×85cm)만 해도 그렇다. 비단과 한지를 섞어 직접 제작한 화판 위에 그의 물감과 세계관이 얹혀지면,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림이 탄생한다.김훈규 작가의 작품을 보면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나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의 현대판을 보는 것 같다. 그의 작품에 깃든 세계관은 종교적이고 정치적이지만, 블랙코미디 같고, 만화적이면서 신화적이다. 역사를 길게 늘어트리면 필연이지만, 스냅샷으로 보면 우연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 인터뷰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김훈규를 런던 보우 아트(BOW ARTS)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보우 아트(BOW ARTS) 앞에서의 김훈규 작가 / 사진. © 이진섭
벽 한 면이 공구로 가득해... 나는 프레임을 직접 제작한다

▷ (벽 한 면이 보쉬 공구 세트로 가득했다) 공구가 참 많네요?
"제가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해요. 프레임도 직접 다 만들어요. (개구리가 그려진 액자를 보여주면서) 이 프레임도 나뭇잎 형태로 직접 제작한 거예요."
[차례대로] 김훈규 작가의 작업실 벽면과 그가 사용했던 붓 / 사진. © 이진섭
김훈규 작가가 직접 제작한 &lt;Whispering 2021&gt;의 프레임 / 사진. © 이진섭
▷ 최근 작업하시는 그림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최근 프리즈 런던에 선보일 <Into the Purple>을 마쳤어요. 지난주 페로탕에서 작품을 가져갔고 (이 인터뷰는 10월 8일에 진행되었다), 프리즈 첫날 페로탕에 전시될 거예요. 프리즈 서울에 선보인 <Into the Red>가 반응이 좋아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좋은 반응에 좌지우지하지 않고 매일 충실히 작업하는 게 저에겐 중요합니다."
프리즈 런던 2024에 출품된 작품 &lt; Into the Purple &gt; / 사진. © 이진섭
▷ 레드, 퍼플, 블루 같이 특정 컬러를 소재로 한 시리즈가 흥미롭습니다. 작가님은 이 색으로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으셨어요?
"프리즈 서울에서 선보인 레드는 서울이에요. 열정적으로 활활 타오르는 서울도 있지만, 우당탕탕 펼쳐지는 삶의 혼란도 거기에 있습니다. 프리즈 런던에 선보이는 퍼플은 런던을 형상화했어요. 성을 지키는 근위병이라든지, 언더그라운드, 유니언잭 등이 각자 나름의 이야기를 갖고 화면에 입주해 있습니다. 블루는 파리를 형상화했는데, 파리 올림픽과 그 나라를 상징하는 수탉, 루브르 박물관 등을 소재로 삼았습니다.작품들은 의지와 의지가 충돌하며 섞이고 다시 조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개인이 겪는 운명적 공포와 충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리즈를 단색화 시리즈라고 하는데, 단색화의 전통적인 맥락을 짚어보면, 수행의 관점이 더 강했거든요. 박서보, 이우환 선생님들께서도 하나의 색을 사용하셨지만, 그 색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와 그리고 캔버스에 발리기 전에 작가 자신이 쌓아온 삶의 자취가 축적돼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제게는 오히려 그 전통과 정반대의 시선에서 우리가 하나의 거대한 색을 접할 때, 색들끼리 서로 충돌하고 뭉치고 섞이는 과정 중 어떤 거대한 색이 탄생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작품 &lt;Into the purple&gt; 앞에서의 김훈규 작가 (페로탕 갤러리 內) / 사진. © 이진섭
▷ 그림을 보면 창문이나 문틀이 많은 것 같아요. 소통을 상징하는 것 같은데, 빼곡하게 채운 캐릭터들을 보면 역설적인 것 같기도 하고.
"맞습니다. 제 그림을 자세히 보면 창과 문이 많이 등장합니다. 캐릭터들이 어떤 자세와 표정으로 문 앞에 직면해 있는지 보시면 더욱 재밌을 거예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 화면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불화(佛畵)의 섬세하고 귀족적 아취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그림은 계시록 같이 보이고, 어떤 그림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캐릭터들이 축제를 벌이는 것 같아요. 어떤 것에 영향을 받으셨나요?
"80년대에 태어난 저희 같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비슷한 문화적 영향권에서 살아온 것 같아요. 93년도에 문민정부 시작되면서 일본 문화가 막 수입되는 시기였고, 자연스럽게 그런 걸 많이 보고 자랐어요. 또 세계사를 좋아해요. 틈틈이 사회과학이랑 철학책을 보는데, 소설은 별로 안 봐요."

▷ 그림이 거대하면서도 섬세해요. 굉장히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에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군상들이 다 우리의 삶이다…라는 간명한 메시지 같고. 혹시 작업하실 때 염두에 두는 것이 따로 있나요?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참 다양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들이잖아요. 복잡계 속에서 삶이 하루하루가 쉽지 않은데, '결국은 이게 다 우리의 삶이다, 내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다'라는 것을 화면에 담고 싶었습니다. 개인이 서로 부딪히는 현실 속에서 운명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혼란과 공포, 에너지를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제 작품은 오히려 추상화에 가깝다고 볼 수 있어요."

▷ 서울대 미술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영국 왕립 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에서 페인팅 석사과정을 마치시면서, 2017년에는 채드웰 어워드(The Chadwell Award)까지 받으셨습니다. 그 후부터 현재까지 런던에서 일궈온 작가 김훈규의 흔적이 궁금합니다.
"사실 런던에서의 삶은 쉽지 않았어요. 오랜 시간 동안 청소부 일도 하고 있습니다. 갖은 일을 다 하면서 매일 10시간이 넘도록 꾸준히 작업했습니다. 작가로서 꾸준히 제 길을 간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작업실에서 작업 중인 모습 / 사진. © 이진섭
▷ 페로탕이 작가님을 선택한 이유, 혹은 작가님이 페로탕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내년에 페로탕 서울에서 개인전이 확정되었어요. 앞으로 올 새로운 기회들을 위해 준비해야죠."

▷ 쉽지 않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왜 작가님은 이 길을 선택하셨나요?
"작가로서 꼭 살아남아야 한다기 보다는 제가 잘하는 것을 끊임없이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게 있어요. 이것을 안 하고 다른 일을 했을 때 어땠을지 생각해보면, 다시 이 길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굉장히 근원적인 충동 같은 게 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아르떼 독점] 김훈규 작가의 작업실에서 공개된 작품 &lt;Into the Blue&gt; / 사진. © 이진섭
3일간 작가의 작업실과 프리즈를 방문하며, 틈틈이 그의 작품을 생각했다. 평소보다 사진도 많이 찍어서 카메라 앞 그의 모습도 이젠 제법 익숙해질 무렵, 그가 작품 안에서 찍은 사진이 쏙 들어왔다. 마치 작가가 작품 그 자체인 것처럼.

런던=이진섭 칼럼니스트•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