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미술관에서 찾는 내 마음

여행의 감동을 남기기 위한 기록
그 속에서 마주하는 '생의 영감'

임지영 예술 칼럼니스트·즐거운예감 대표
여행에는 삶의 행운이 따라줘야 한다. 불운의 모든 변수가 비껴가야 가능한 것이어서다. 아무 일 없는 일상이 기적이라는 걸 깨닫는 게 여정이다.

미국 서부 예술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내내 미술관만 다니는 여행. 게다가 그냥 수동적 관람이 아니었다. 미술관마다 향유와 기록을 위한 미션이 있었다. 미션을 수행하고 공유하면서 서로 소통했다. 처음엔 낯설지만, 이 방식은 예술 감상에 퍽 유용했다. 시간을 아껴 조금 빨리 걷고, 많이 보고, 가득 담고자 애썼다. 멀리 간 만큼, 다시 오기 힘든 만큼 절실한 감상 욕구가 꿈틀거렸다.미국 서부는 모든 미술관이 광활했다. 대륙의 스케일과 자본의 힘에 압도될 지경이었다. 게티 뮤지엄은 온종일 머문다고 해도 다 보지 못할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미술관 미션이다. 아예 어떤 주제를 갖고 미술관에 들어가는 것. 그렇게 그림 한 점에 대표성을 부여하고 그를 통해 전체를 기억했다. 소중한 순간을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 우리는 악착같이 기록했다.

로스앤젤레스(LA)에는 100여 개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다. 동부에 비해 훨씬 늦은 예술의 태동을 수량으로 이기려고 한 것인지 미국에서 제일 많다고 한다. 예술은 이렇듯 선진국의 지표다. 한국도 문화·예술을 위한 더 전방위적인 지원과 저변 확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간 MOCA 미술관. 특별전에서는 기후 위기를 다룬 설치 작품 등을, 상설전에선 마크 로스코와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의 소장품을 전시했다.

다음에 찾은 더브로드 미술관도 흥미진진했다. 부동산 재벌인 브로드 부부의 컬렉션을 볼 수 있다. 특히 유명한 현대 미술은 이곳에 다 있다. 제프 쿤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장 미셸 바스키아, 조지 콘도 등.널려 있는 명작들 앞에서도 다리는 아파 왔다. 중간중간 의자에 앉아 쉬었다. 가만 보니 사람들은 작품 앞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많이 했다. 나이 든 부부와 노인도 상당히 많았는데, 다정하게 대화하는 이들이 많았다. 늙는 일이 두렵지 않아졌다.

미술관에서의 미션은 내 마음의 단 한 점 찾기,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한 점 찾기, 재밌는 그림 이상한 그림과 나의 취향 세 점 꼽아보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어떤 그림으로 기억되고 싶은가가 제시됐다.

우리는 먼 나라에 있는 거대한 미술관 한 귀퉁이에서 내 마음의 한 점을 찾아냈다. 소중한 사람에게 주고 싶은 그림도 금세 찾았다. 나의 취향도 찾고, 다른 이들의 취향도 끄덕끄덕 존중했다.그렇게 고른 그림에는 지금 나의 모습이 오롯이 들어 있었다. 나는 어떤 그림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마지막 미션에 나는 노턴사이먼 뮤지엄에서 만난 파울 클레의 ‘바다에서의 가능성’을 골랐다. 망망대해 배 한 척, 눈앞의 항로들. 헤맨다 생각하면 조난이고 나아간다 생각하면 길이다.

감상을 기록하는 이 방식이 누구에게나 맞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적극적 향유가 예술을 좀 더 재밌는 것, 유익한 것으로 바꾼다.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건 지향뿐. 거센 파도 속에서도 수많은 선택의 가능성을 믿고 나아가는 그런 그림으로 기억되고 싶다.

많은 사람이 여행지에서 미술관에 간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어디를 갔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하지 못하곤 한다. 생의 영감을 휘발하지 않고 붙잡아 기록해 두면 더 오래, 더 많이 웃을 수 있다. 미술관에 가면 꼭 내 마음의 한 점을 찾아 기록해보자. 예술이 생의 영롱한 보석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