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타분하다고? 파격이야말로 클래식 음악의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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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은아의 머글과 덕후 사이클래식, 클래시컬.
오래됐다고 해서 파격을 모르겠는가
이름부터가 벌써 ‘파격'을 좀처럼 허용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클래식) 음악은 항상 틀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진화해 왔다. 연주 시 아주 조그마한 변화를 가미해도 “바흐를 이렇게 해석한다고? 이게 맞아??”라는 물음표 세례를 맞곤 하는 바흐 작품들 역시 당대에는 과감한 음악적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초월적인 기량을 요구하는 혁신적인 곡이었다.모차르트도, 베토벤도, 말러도, 브루크너도, 쇼팽도 모두 그들만의 파격을 간직한 작곡가들이다. 그들이 처음 세상에 꺼내 놓은 것들은 낯설었지만, 그 새로움이야말로 오랜 시간 동안 (조금 많이 오랜 시간 동안…)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널리 사랑받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래서인지 연주자 혹은 연주회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그렇게 기쁠 수 없다. 최근 머글의 눈과 덕후의 귀를 쫑긋하게 했던, 파격과 혁신 사이 어딘가의 몇 가지를 소개한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덕우의 팔계
독주회일 줄 알았는데 베이스 연주자와 쳄발로 연주자를 포함해 무려 18인이 무대에 올라 연주해 흡사 체임버 오케스트라급 연주를 만들었다. 연주곡목은 비발디의 사계와 피아졸라의 사계, 두 곡목이 적혀 있었는데 새로움은 그 구성에 있었다. 비발디의 각 계절과 피아졸라의 각 계절을 교차 배치해 총 여덟 곡의 계절을 연주했다. 이런 형태가 자주 있는 일인지 모르겠으나, 머글에게는 그저 새롭기만 했다.비발디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수없이 많이 연주돼 모두의 귀에 익을 만 하지만, 피아졸라의 사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절')와 교차해 들려오니 또 무척 새로웠다.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비발디의 화사하고 청량감 넘치는 세계를 걷다가, 문득 피아졸라의 꾸덕하고 녹진한 탱고를 접하면 왜 많은 사람들이 피아졸라에게서 원초적 정열을 읽는지 자연히 이해되었다.
비발디의 봄으로 시작해 피아졸라의 봄으로 끝낸 구성 역시 익숙한데 새롭고, 새로워서 즐거운 매력을 극대화했다. 무대 위 열여덟 명으로부터 전해오는 싱그러운 에너지도 음악과 더없이 잘 어울렸다. (중간에 제 1바이올린 연주자 한 분의 현이 끊어지는 사고도 있었지만 다행히 곡이 끝나갈 즈음이었다)
▶▶▶[관련 칼럼]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미셸 스트라우스 듀오 리사이틀
첼리스트 미셸 스트라우스와 피아니스트 지지안 웨이의 듀오 연주회였는데 이들의 파격은 바로 연주회에서 제시하는 새로운 공간적 경험이었다. 건물 지하에 위치한 작은 갤러리에서, 첼리스트는 피아노 모양의 러그 위에 스토퍼도 없이 관객들과 똑같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연주한다. 손때 묻은 몇 벌의 종이 악보를 가지고 나온 백발의 첼리스트와 아이패드 하나만 들고나온 청년 피아니스트가 만났다.
객석은 단 3열뿐, 20여 명의 관객이 옹기종기 앉았다. 갤러리라는 장소가 주는 예술적인 기운과 피아노, 첼로라니... 낭만이 치사량까지 차오르는 조합이었다. 첼리스트와 관객의 거리는 2미터가 채 안 될 만큼 가까웠고, 둘러앉은 모든 관객이 숨죽여 두 명의 소리에 집중했다.그리그, 베토벤, 포레로 구성된 곡들은 하나같이 따뜻했고, 미셸 스트라우스의 첼로 소리는 깊고 또렷했다. 젊은 피아니스트 역시 대단한 몰입으로 때로는 첼리스트를 다독이고 때로는 귀 기울이며 다정하게 함께 걸었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백석의 시 <고향>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고택에서도, 하우스에서도, 레스토랑에서도 연주회가 일어난다. 주로 대규모 오케스트라 연주를 집중해 소비하는 덕후에게는 이렇게 서로 가까이 앉아, 꾸밈없이 이루어지는 초소형(!) 공연이 그 자체로 새로웠다.
당신이 있는 그곳, 오페라 하우스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가 익숙한 장소, 익숙한 멜로디, 그런데 낯선 풍경을 발견했다! 청계천에 피아노가 놓여 있고, 그 피아노가 라 트라비아타 속 “축배의 노래"를 연주하는데, 테너 김건우와 소프라노 박혜상이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호기심이 동해 프로그램을 쭉 지켜보니, 오페라를 테마로 한 일종의 버스킹이었다.
도서관, 쇼핑몰, 청계천(!) 등 의외의 장소에 성악가가 출동해 오페라의 아름다운 곡을 노래하고, 해당 곡이 전체 오페라 극에서 어떤 의미인지, 노래 속에 숨어있는 이야기는 무엇인지, 캐릭터성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해설도 해준다. 성악가들의 시각적 연기까지 더해져 행인은 어느새 관객이 되고, 물결이 노을빛으로 반짝이는 청계천 변은 오페라 하우스가 된다.
▶▶▶[관련 영상] 한경arteTV '오페라 하우스 시즌2 - 소프라노 박혜상, 테너 김건우'
비록 출시된 지(!) 이백 년 가까이 된 음악이지만 곡의 해석에도, 프로그램 구성에도, 연주회 장소와 내용 면에서도 꾸준히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클래식 음악은 새롭고, 하늘 아래 똑같은 공연은 없다. 오늘도 덕후가 연주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이다.
이은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