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 마약의 중심에서 예술을 외치다, 화이트 큐브 버몬지

[이진섭의 음미(美)하다]

'프리즈 런던 2024' Beyond the Scene #2 [갤러리]
화이트 큐브 (WHITE CUBE)

런던 대표 갤러리이자 프리즈를 움직이는 큰 축
예술 창고로 시작해 예술 랜드마크로 자리매김

화이트 큐브 수장고에서 故 박서보 화백의 유작과 대면
프리즈 런던 2024에 맞춰 트레이시 에민 특별전 개최
'프리즈 런던 2024' Beyond the Scene 2편에서는 런던을 대표하는 갤러리이자 프리즈를 움직이는 큰 축, 갤러리 화이트 큐브(WHITE CUBE)를 소개한다. 화이트 큐브는 작가와 어떻게 관계하고, 문화의 장(場)을 만들어 왔는지, 버몬지를 예술과 낭만의 지역으로 재탄생시킨 저력은 무엇인지, 창의적이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화이트 큐브의 DNA 그 자체였던 알렉스 오닐 (Alex O’Neill, Senior Director of Communication)과 김예원(Yewon Kim, Senior Artist Coordinator)을 만나 런던 컨템포러리 예술의 보물창고 같은 화이트 큐브 버몬지를 탐험했다. 트레이시 에민 특별전을 담당한 에밀리 에르만(Emily Ehrman, Senior Artist Coordinator)의 이야기도 들어보았다.

故 박서보 선생님의 유작과 트레이시 에민의 작품이 공존했던 화이트큐브 버몬지를 아르떼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시선으로 담았다.
화이트 큐브 전경 / 사진. © 이진섭
故 박서보 유작과 트레이시 에민 작품이 공존했던 화이트 큐브
예술 창고로 시작한 공간, 이제는 런던 예술 랜드마크로


2008년 즈음 런던 유학을 꿈꿨던 시기에 런던에 잠시 머물던 때가 있다. 그때 홈스테이 주인 할아버지께서 가급적 피해야 할 위험지대로 두 곳을 얘기하셨는데, 한 곳이 클럽의 성지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가 위치한 엘리펀트 캐슬이었고, 다른 한 곳이 런던 브릿지 기차역 부근 버몬지였다. 지금은 ‘천지가 개벽했다’고 할 정도로 버몬지는 완전히 다른 동네가 되었는데, 이런 변화에 일조한 것이 화이트 큐브 갤러리였다. 시장 경제의 본토인 이 땅에서 자본의 힘으로만 어두운 면이 치유되었다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겠지만, 그 변화의 선봉에 아트 갤러리가 있었다는 점은 예술의 본질적 가치와 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화이트 큐브 내부 / 사진. © 이진섭
제이 조플링의 화이트 큐브

화이트 큐브는 제이 조플링(Jay Jopling)이 설립한 영국을 대표하는 컨템포러리 갤러리다. 런던에는 버몬지와 메이슨 야드 등 두 곳에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제이 조플링은 영국에서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력이 큰 갤러리스트다. 물론 여기엔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에서 농무부 장관을 역임한 마이클 조플링 남작이 그의 아버지라는 점과, 이튼 스쿨과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예술사를 공부한 엘리트라는 점도 한몫했다. 이른바 배경과 실력이 다 겸비된 ‘사기캐’다.

그가 초기에 주목했던 데미언 허스트, 마크 퀸, 트레이시 에민, 사라 모리스, 개빈 터크 등 소위 YBA(Young British Artists) 그룹에 속한 대부분의 아티스트, 그리고 루시안 프로이드 같은 아티스트는 컨템포러리 아트에 한 획을 그으며, 평단과 시장의 평가를 동시에 인정받은 인물들이다. 10월 9일 크리스티 경매에서 루시안 프로이드의 누드 자화상은 1,181만파운드(약 208억)에, 데미언 허스트의 은 94만파운드(약 16억)에 낙찰되었는데, 이런 아티스트를 초기부터 알아본 제이 조플링의 선구안은 현재 화이트 큐브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핵심 역량으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화이트큐브는 런던, 홍콩, 파리 등 전 세계적인 갤러리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으며, 2023년 9월에는 서울 강남 호림아트센터에 문을 열어 국내 예술 팬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알렸다.독보적 시스템과 노하우를 갖춘 화이트 큐브의 수장고
故 박서보 화백의 유작과 대면

런던에서 범죄와 약쟁이투성인 버몬지에 갤러리가 선다고? 처음 화이트 큐브가 버몬지에 위치한다고 했을 때, 런던 아트씬과 화이트 큐브 내부의 반응이었다. 1970년대부터 BBC의 창고로 쓰였던 이 공간은 2011년 10월 화이트 큐브가 자신들의 작품을 보관·보수하고, 운송케이스를 제작하고, 작품을 촬영하는 용도로 사용하다가 전시의 기능을 갖춘 정식 갤러리로 거듭났다.
트레이시 에민의 청동 작품 <I followed you to the end>를 전시하고 있는 화이트 큐브 / 사진. © 이진섭
오랜 기간에 걸쳐 화이트 큐브는 자신들의 수장고를 타 갤러리들과는 차별된 시스템으로 구축했다. 작품보존전문가, 사진가, 목공전문가 등이 갤러리 직원으로서 모든 프로세스가 원활하게 이뤄지는 인-하우스 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전시 공간은 초기 흰색 벽과 큐브 공간을 모티브로 삼아 간결 명료한 영국 예술의 정체성을 살렸다. 마치 콜드플레이의 음악을 듣는 것 같이 전시 공간은 Simple & Core 그 자체였다.
[차례대로] 화이트 큐브 버몬지 수장고 내부, 박서보 화백 작품이 들어있는 운송케이스 / 사진. © 이진섭
수많은 예술작품이 쌓여 있는 수장고 한 편에 과거 데미언 허스트의 폼알데하이드 작품들만 다루던 화학물질 취급시설이 있었다. 시선을 돌려보니, 수장고에서 눈에 띄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박.서.보! 화이트 큐브의 김예원님이 보여줄 게 있다며, 수장고 한 편으로 안내해줬다.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들을 다루던 화학물질 취급시설 창고 / 사진. © 이진섭
故 박서보 선생님의 묘법 중 여태껏 본 적 없었던 작품 한 점이 놓여져 있었다. "이것은 박서보 선생님의 유작인 <뉴스페이퍼 묘법>이에요. 총 51점의 작품을 작업하신 것 중 오늘 보여드리기 위해서 특별히 한 점 가지고 왔어요." 예원님의 목소리에 묘한 떨림과 기쁨이 묻어나왔다.
화이트 큐브의 시니어 아티스트 코디네이터 김예원. 김예원은 박서보 화백이 화이트 큐브에서 첫 전시를 한 2016년부터 화백을 담당해왔다 / 사진. © 이진섭
"묘법의 화판을 신문들로 직접 제작하신 건데요. 작업하실 때 선생님의 아내 윤명숙 여사께서 태어난 날에 발간된 세계 각국의 신문들을 저와 화백님의 제자분들이 찾아서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시기 하루 전에 ‘내가 일어나면 보여줄 아이디어가 있어.’라고 하셨던 게 마지막 모습이셨습니다.”

작품 뒤 편에 박서보 선생님께서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글자 하나하나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위] 故 박서보 화백의 유작 &lt;뉴스페이퍼 묘법&gt; (작품 전면) [아래] 아내 윤명숙 여사에게 바치는 헌사 (작품 후면) / 사진. © 이진섭
프리즈 런던 2024에 맞춰 열린 트레이시 에민 특별전
에곤 실레의 터치와 뭉크의 절망적 감성이 녹여진 작품

현존 컨템포러리 여성 아티스트 중 가장 직설적이고 강렬하면서, 도발적이고, 솔직한 트레이시 에민의 표현법은 에곤 실레와 뭉크를 닮았다. 여성의 몸과 잠자리, 성행위와 폭력적 잔해에 대한 날 것 그대로를 창조하는 트레이시 에민의 특별전인 'I followed you to the end'가 프리즈 런던 2024 기간에 맞춰 열렸다. 전시는 갤러리의 전체 공간을 아우르며, 회화 신작과 현재까지 공개된 작품 중 가장 큰 규모의 청동 조각 그리고 새로 선보이는 짧은 영상 작품 등으로 이뤄졌다.
트레이시 에민 &lt;The End of Love&gt;(2024) / 출처. 화이트 큐브
사랑, 삶, 죽음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며, 최근 작가의 암 투병 과정을 담은 영상과 그림들은 화이트 큐브의 넓게 트인 공간을 가득 채워 작가의 세계를 좀 더 깊숙이 탐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트레이시 에민의 그림은 매우 본능적이에요. 미리 계획하지 않는, 일종의 발생한 일인 거죠. 그저 본인의 감정을 토해내는 것에 가깝다고 보면 돼요.” (에밀리 에르만)
트레이시 에민 특별전 담당 코디네이터 에밀리(왼쪽)와 전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화이트 큐브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알렉스(오른쪽) / 사진. © 이진섭
과감하고, 솔직한 그의 작품은 미완성인 그림 같으면서도 짙은 감성과 깊이가 느껴졌다. 툭툭 던지는 색의 투사와 어그러진 형체의 인간 군상. 그리고 여성의 몸과 상처. 고통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역동적인 이야기를 그려낸 트레이시 에민의 작품 중 <Like a cloud of blood>는 2022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232만 파운드(약 41억)에 팔렸다.

런던=이진섭 칼럼니스트•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