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숟갈은 정 없으니까 두 숟갈 더, 팥죽 한 그릇에 온 세상이 모락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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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최지인의 탐나는 책어릴 땐 밖에서 사 먹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음식들이 있다. 찰밥, 미역국, 죽, 생선구이, 샐러드 같은 것들.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거의 밖에서 먹는 일이 대부분인 메뉴들.
우신영 글, 서영 그림『언제나 다정 죽집』(비룡소, 2024)
그중에서도 죽은 이제 식당에서도 종종 먹고, 시장에서 종류별로 소분하여 파는 죽이나 파우치에 담긴 레토르트 죽을 집에 떨어지지 않게 구비해놓고 먹는다. 어릴 때는 아플 때 먹는 멀건 죽이 참 싫었는데, 어른이 되고 나서는 간단하게 먹기 좋은 음식으로 죽만 한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더운 여름날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시원한 호박죽으로 열기를 식히고, 꽁꽁 언 겨울날 따뜻한 팥죽으로 영혼에 온기를 채우곤 한다.죽 예찬이 너무 길었지만 우신영의 『언제나 다정 죽집』을 읽고 나면 다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죽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물론 ‘다정 죽집’의 주력 메뉴는 팥죽이지만 그 부드러운 식감과 함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옛날 맛’에 대한 추억이 있었다.
이야기는 오랫동안 다정 죽집을 함께 운영하던 남편을 잃고 임대료도 내기 힘든 상황에 몰린 할머니가 건물 주인에게 퇴거 통보를 듣게 되며 시작된다. 동짓날 이후 폐업이 예정되자 살아온 터전을 잃을 위기에 놓인 가마솥과 주걱, 그리고 홍두깨가 다정 죽집을 지키고자 신메뉴를 개발한다. 그동안 팥죽을 먹으며 자란 길고양이 팥냥이를 통해 고양이빵 레시피를 얻게 되는데, 만드는 과정만으로 맛이 상상되면서 군침이 고인다.
배앓이를 하던 어린 시절도, 감기에 걸린 한겨울에도, 세 딸을 낳고 몸조리를 할 때도, 늙어 가며 병원 신세를 질 때도. 그리고 할아범을 먼저 보내고 앓아누웠을 때도 이 팥죽으로 기운을 차렸어요. 하얀 그릇 바닥이 보일 때까지 붉은 팥죽을 먹어 치우면 어느새 어두운 기운이 물러가고 새 기운이 들어왔죠. (83~84쪽)이 책은 동화지만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반려자를 잃은 슬픔, 오래된 것들의 사라짐, 젠트리피케이션과 문어발식 프랜차이즈⋯⋯. 다루는 정서와 문제가 절대 간단하지 않다. 더불어 모두의 향수를 자극하는 팥죽과, 빵순이 빵돌이를 설레게 할 팥빵 묘사, 그리고 항상 두 주걱 더 얹어 꽉 찬 팥죽 한 그릇으로 누군가의 유년을 결핍 없이 채워준 소박하지만 위대한 다정함까지. 창백한 편의점 불빛 아래서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에게도, 팍팍하고 건조한 일상을 보내는 어른들에게도 모두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바람이 차갑고 해는 짧아지는 계절이다. 추위를 피해 옹송그린 채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당신도 다정한 음식으로 기운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
최지인 문학 편집자·래빗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