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단상, 그리고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수상작 <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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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지난 11일, 열흘에 걸친 부산국제영화제의 화려한 막이 내렸다. 올해 유난히도 ‘화려한’ 외양을 보였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지난 몇 년을 통틀어 가장 역대급 수의 셀러브리티들과 영화 인사들이 올해 영화제에 함께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현재 한국 영화산업에서 탑 티어를 차지하고 있는 배우와 감독 그리고 제작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듯하다.이러한 유례없는 높은 출석률(?)에는 두 가지 이유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산업의 축소로 인해 상대적으로 배우들을 섭외하기가 용이했던 것이다. 실제로 영화제에서 만났던 한 유명 배우는 "이렇게 여유롭게 영화제를 찾게 된 것이 몇 년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일이 줄어서 가능한 일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두 번째 이유, 그리고 아마도 이번 영화제의 ‘셀럽 홍수’에 더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이는 요인은 OTT 작품들의 포진이다. 팬더믹 이후, 넷플릭스, 티빙의 오리지널 영화와 드라마들을 쇼케이스 하기 시작했던 부국제는 그 포션을 점점 늘려가면서 올해는 OTT 작품 수로 역대 최대 편수를 기록했다. 이러한 프로젝트의 배우들(일반적으로 영화의 참여 배우 인원보다 많은)이 대거 영화제의 홍보행사에 참여하면서 역대급 셀럽 출몰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물론 배우들이 많이 참여한 것이 결코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제가 OTT와 셀럽 기사로 잠식되면서 올해 영화제에 참여했던 거장 감독, 예를 들어 레오 카락스의 내한이나 주목할만한 한국 독립영화 같은, 영화제의 중추가 묻혀버렸다.
배우, 감독, 제작자들 높은 출석률 보였으나
거장 감독의 내한, 한국 독립영화 등 영화제 중추는 가려져
주목할만한 한국 독립영화
[비전] 섹션 '한국영화감독조합 플러스엠상' 수상
부산국제영화제의 [한국영화의 오늘 : 비전]은 [뉴 커런츠]와 함께 영화제의 정체성을 가늠하는 매우 중요한 섹션이다. 서울독립영화제가 한국 독립영화의 현재를 조명하는 독립영화들을 국내 관객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면, 부국제의 [비전] 섹션은 한국의 수려한 독립영화들을 (국내 관객과 함께) 해외 게스트와 해외 프로그래머·저널리스트, 그리고 해외 베이스의 산업 관계자들에게 소개해왔다. 90년대 말, 홍상수와 임순례 감독의 작은 영화들이 해외 평론가와 저널리스트를 통해 글로벌 관객을 만나게 된 것에는 부국제의 역할이 컸다고 할 것이다.
올해 역시 [비전] 섹션은 주목할만한 한국 독립영화들을 큐레이션 했다. 그 중 황슬기 감독의 <홍이>는 단연코 관객의, 그리고 평자들의 선택을 받아 마땅한 수작이다. <홍이>는 올해 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 플러스엠상'을 수상했다.영화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할머니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이홍’(장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가는 홍이는 그간 쌓아 온 빚을 청산해야 할 시기가 오자 어쩔 수 없이 치매로 요양원에 머물고 있던 엄마(변중희)를 데려오기로 결심한다. 엄마의 존재보다, 엄마가 가진 통장이 절실했던 것이다. 홍이는 급전을 해결하지만 엄마가 온 그날부터 또 다른 지옥의 문이 열린다. 엄마의 치매는 나날이 심해지고, 그만큼 홍이를 향한 심통과 독설도 흉포해진다. 엄마는 평생토록 홍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칭찬 한마디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엄마의 발톱에 홍이는 빨간 매니큐어를 발라주며 속을 삭인다.<홍이>는 현대판 고려장 이야기다. 다만 고려장으로 업혀 가면서도 아들 걱정을 했다는 어진 어머니와 이기적인 아들을 뒤바꾼, 현대, 혹은 현실의 이야기랄까. 이는 다소 불순한 의도로 엄마를 데려왔지만 그 안에서 일종의 안식을 찾고, 그럼에도 다시 엄마를 요양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홍이의 애처로운 이야기, 그것은 옛날 고려장 전설 속 불효자식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며, 미래이기도 하다.<홍이>는 말하자면 모든 것을 다 갖춘 영화다. 이는 분명 사회적 현실, 그리고 제도의 부재를 이슈화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대주제’는 매우 일상적이고도 디테일한 사건과 상황들로, 그리고 그사이를 오가는 감정의 기류들로 첨예하고 감각적으로 그려진다. 황슬기 감독의 섬세하고 성실한 연출과 함께 극찬을 받아야 하는 요소는 바로 변중희와 장선 배우의 놀라운 연기다(특히 장선 배우의 연기는 매번 그 ‘놀라움’을 경신하는 듯하다). 치매 노인을 여러 차례 연기해 온 변중희 배우지만 이번 <홍이>에서의 그녀는 마치 ‘치매’라는 질환을 재해석하듯, 혹은 치매라는 병마를 인간으로 형상화하듯, 새로우면서도 성찰적이다. 엄마를 잠식한 악마와 싸워야 하는, 혹은 그럴 수도 없는, 딸을 연기하는 장선 역시 마찬가지다. 이 둘의 앙상블은 가히 독립영화의 역사에 남겨두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다.<홍이>는 분명 부국제가 성취한 신통한 발견 중 하나다. 넷플릭스 영화인 <전, 란>을 개막작으로 전면 배치하고, OTT 대작들을 영화제의 메인 스펙터클로 선택했음에도, 그래도 <홍이> 같은 좋은 한국 독립영화들이 발굴되었다는 것은 안도할 만한 일이다. 올해의 ‘외양’으로는 다소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부산국제영화제는 독립영화가 우선”이라는 그들의 슬로건을 믿고 싶은 이유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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