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시에서도 안 꺼냈던 뱅크시 설치작, 세계 최초로 서울에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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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충무아트센터 갤러리신당영국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된 빨간 공중전화 박스.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이 전화 부스가 옆구리를 곡괭이에 찍힌 듯 휘어버린 채 바닥에 드러누워 있다. 강렬한 빨간 색감 때문에 마치 전화박스가 피를 흘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ICONS OF URBAN ART – 어반아트: 거리에서 미술관으로'
영국에서 첫 반출된 뱅크시 설치작
'훼손된 전화박스' 서울서 첫 공개
이 작품은 '은둔의 거리 미술가' 뱅크시가 2005년 런던의 한 골목에 설치한 뒤 사라져 화제를 불러일으킨 '훼손된 전화박스'다. 작품이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약 20년간 단 한번도 해외에서 소개된 적 없는 작업이다. 대형 조형 작업 특성상 운송이 어려운데다, '길거리 예술'을 조명하는 전시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10월, 서울 충무로에서 뱅크시의 화제작 '훼손된 전화박스'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충무아트센터 갤러리 신당에서 열리는 전시 'ICONS OF URBAN ART – 어반아트: 거리에서 미술관으로'를 통해서다. 전시가 열리기 전부터 뱅크시의 전화박스가 공개된다는 소식에 기대를 불러모았다. 영국 밖으로 이 작품이 반출되어 관객을 만나는 것은 이번 전시가 세계 최초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일본에서 열렸던 같은 전시에서도 뱅크시의 해당 작품은 전시되지 않았다.뱅크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작가다. 생년월일도, 나이도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다. 영국 브리스톨에서 1970년대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중학교 시절 그래피티로 시작해 활동 범위를 넓혔다. 거리를 무대로 세계의 역사와 과거, 현재와 현실에 대해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며 유명해졌다.
뱅크시는 특히 기존의 미술 권력을 거부하며 활동해왔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갤러리들의 접근을 거부하고,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자기 작품을 '몰래' 들여놓는 등 미술 기득권에 끊임없이 반항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경매에서 낙찰된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미술계에 큰 충격을 준 인물이다.전화박스 외에도 뱅크시가 그렸던 유화와 벽화, 설치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다. 중동지역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갈등을 다룬 팔레스타인 벽화도 나왔다. 명화를 오염시켜 만든 ‘오염된 유화‘ 시리즈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귀도 레니의 1621년 명작을 뱅크시가 재해석한 ‘해변의 바쿠스'가 걸렸다.
이번 전시에서는 뱅크시를 비롯해 길거리를 무대로 예술을 펼친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업들을 선보인다. 그래피티, 포스터, 스트리트 아트 등으로 불리는 예술 장르인 '어반 아트'를 집중조명하는 전시이기 때문이다. 벽과 건물, 도로 등 현대 도시 속 공공장소에서 접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예술을 전시장으로 옮겨왔다.과거 경범죄로 여겨졌던 작품들이 새로운 도시 풍경을 형성한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뤄졌다. 단순히 미적인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사람들에게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는 점도 전시를 관통하는 큰 주제다. 어반 아트는 오늘날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순수 미술보다도 대중들에게 더 가깝고 쉽게 다가간다는 점에서 중요한 미술 사조로도 통한다.현재 미국 워싱턴 허쉬혼미술관에서 전시를 펼치고 있는 아트 듀오 오스 제미오스의 작품도 선보인다. 포투루갈어로 '쌍둥이'라는 뜻의 오스 제미오스는 일란성 쌍둥이 듀오다. 현재 브라질에서 가장 유명한 스트리트 아티스트로 통한다. 회화와 드로잉, 조각 등 영역을 넘나들며 스트리트 예술 세계를 펼친다. 이번 전시에는 악기에 그린 회화, 만화 등이 나왔다. 이들은 자신의 작업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상상하게 자극하는 것에 주목한다.이번 전시는 독일 미술관 MUCA와의 협업으로 이뤄졌다. MUCA는 독일 최초의 어반 아트 미술관으로, 2016년 설립 이후 다양한 길거리 예술 작품을 소장해 왔다. 세계를 돌며 길거리 예술을 주제로 한 전시를 전개하고 있다.
이들은 이번 전시를 통해 국내 관객들을 만나기 위해 설치, 회화, 사진 등 여러 형태의 어반 아트 소장품들을 들고 서울을 찾았다. 뱅크시를 비롯해 프랑스 거리 사진가 제이알, 1980년대 뉴욕 거리예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리처드 햄블턴 등 도시 예술의 아이콘이 된 작가 10인의 대표작을 한국 최초로 선보인다. 전시는 2025년 2월 2일까지 이어진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