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연 칼럼] 중도상환 수수료 폐지가 마땅하다

대출 총량제까지 쓰는 마당에
빚 갚기 제재하는 건 어불성설

유병연 논설위원
가계 부채는 우리 경제가 당면한 최대 리스크다. 국제금융협회(IIF)의 ‘세계 부채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4분기 기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100.1%로 조사 대상 34개국 중 유일하게 GDP를 웃돌았다. 이대로 방치하면 서민 파탄은 물론 금융 부실, 경제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국가적 위협이다. 금융당국이 가계대출을 억제하기 위해 ‘대출 총량 규제’라는 극약 처방까지 들고나온 배경이다.

지난달 말 기준 예금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1135조7000억원으로, 전달보다 5조7000억원 증가했다. 2단계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시행으로 증가폭은 전달보다 줄었지만, 신규 주택담보대출은 하루 평균 3934억원으로 역대 최대였다. 한국은행의 최근 기준금리 인하 조치가 부동산시장을 자극할 가능성도 있어 낙관하기 어렵다.이런 상황에 대출을 갚고 싶어도 제동을 거는 걸림돌이 있다. 바로 중도상환 수수료다. 현재 은행은 주택담보대출의 경우 1.2~1.4%, 신용대출은 0.6∼0.8% 수준의 수수료를 부과하고 있다. 주담대는 3년 내, 1년짜리 신용대출은 9개월 내 상환 시 적용된다. 주택담보대출을 3억원 받아 1년 만에 상환하면 중도상환 수수료는 280만원 정도다. 이런 제재 탓에 여윳돈이 생겨도 상환을 주저할 뿐 아니라 금리 인하 시기에 이자가 낮은 대출로 갈아타기조차 어렵다.

이 수수료는 고객이 대출을 중간에 상환하면서 발생하는 은행의 경제적 기회손실에 대한 계약 위반 보상금이다. 감정평가 수수료, 인지세 등 대출 실행 시 은행이 부담하는 비용과 자금 운용 기회손실 등을 포함한다. 은행은 이 수수료로만 한 해 평균 3000억원가량을 벌어들인다. 올해 들어 6월까지 수입만 1928억원에 달했다. 요즘 같은 금리 인하 시기에 기존 고금리 고객을 가둬놓으면서 올리는 수익은 훨씬 많다. 올해 들어 은행에서 발생한 횡령, 배임 등 금융사고 금액은 1137억원. 허술한 내부 통제로 발생하는 피해만 막아도 중도상환 수수료 폐지에 따른 손실 대부분을 상쇄할 수 있다.

수수료를 폐지하면 대출금리가 올라 오히려 서민의 부담을 가중한다는 건 은행의 강력한 방어 논리다. 은행은 자금을 조달해 금융소비자에게 빌려주고 받는 이자 이익을 바탕으로 자금 운용 계획을 세운다. 중도에 대출금을 상환하면 예측 가능성이 줄고, 이 리스크에 금리를 올려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결국 거대 은행의 리스크 관리 부담을 아무 힘도 능력도 없는 차입자에게 모두 떠넘기는 셈이다. 이렇게 땅 짚고 헤엄치는 사업이 또 있을까 싶다. 카카오뱅크, 토스뱅크 등 시장에 새롭게 뛰어든 인터넷전문은행이 수수료 면제 경쟁을 하고 있지만, 배부른 시중은행은 강 건너 불구경이다. 이처럼 혁신 없는 환경에서 우리 금융이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은행권은 저신용·저소득 취약 차주에게 중도상환 수수료 면제 혜택을 지원하며 생색을 내고 있다. 정부는 내년부터 중도상환 시 은행이 부담하는 손실·행정 비용 등 실제 비용 내에서만 수수료를 부과하도록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감독규정’을 개정했다. 하지만 폭증하는 가계대출의 폭발력을 감안할 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대출 억제를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마당에 조기에 빚을 갚으려는 차주에게 제재 성격의 수수료를 물리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가계 빚이 진정될 때까지라도 중도상환 수수료를 면제해주는 게 맞다. 이 조치가 금리 인상이 아니라 차주에게 실질적인 도움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모니터링은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