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에 뛰어든 '빛을 주름잡는 한지 공예가' 권중모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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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지공예가 권중모
2023년 브랜드 '르베이지'와 손잡고
주름과 빛에 주목한 컬렉션 만들어
"한국의 이세이 미야케" 극찬도
"한국의 정체성과도 같은 한지
의류 디자인 도전은 인생의 터닝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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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르베이지가 권중모와 함께 '주름 컬렉션'을 처음 선보이자마자 패션계는 뜨겁게 반응했다. 3번째 시즌을 거치며 공개되는 족족 의상과 소품이 '완판'되며 인기를 몰았다. "한국의 이세이 미야케가 나타났다"는 특급 칭찬이 쏟아지곤 했다. 하지만 권중모는 호들갑 섞인 칭찬에도 동요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어떤 경로를 통해 자신을 알게 되었든, '한지 공예가'라는 정체성만이 그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완연한 가을 바람이 불던 날, 권중모의 디자인 컬렉션이 가득한 한남동 ZIP739에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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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업에 있어 한지는 전부와도 같다. 권중모와 한지의 만남은 스페인 유학 생활을 거치며 이뤄졌다. 그는 “스페인에서 다른 나라 유학생들을 많이 만났는데, 각 나라마다 정체성과도 같은 소재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며 “핀란드는 자작나무라는 소재를 써서 가구를 만들고, 가죽이 유명한 스페인은 가죽공예가 발달한 모습을 보며 전통적으로 쌓여 온 소재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또 유럽에서 ‘산업디자인’이라는 개념에 대해 완전히 달리 인식하게 되었다고도 했다. 그는 “한국은 전자제품이나 대형 기기를 찍어내는 걸 산업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유럽에서는 소파나 조명 등 집에 있는 모든 걸 다 산업디자인의 범주로 여긴다”며 “그걸 깨닫자 나도 뭔가를 기계적으로 찍어내는 것 말고 실생활에 쓰이는 것 모두를 산업디자인으로 여기게 됐다”고 했다.
전문 공예가로 자리잡은 그에게도 의상 디자인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권중모는 "조명과 달리 움직임이 있는 소재라는 점이 가장 어려웠다"며 "3번이나 시즌을 하다 보니 이전과 매번 주름을 다르게 잡아야 한다는 점도 새로웠다"고 말했다. 여기에 르베이지의 정체성도 중요시 여겼다. 그는 “토종 브랜드로 오래 자리잡고 있는 르베이지만의 시그니처, 고유성을 드러내보이고 싶었다”며 “기교 대신 브랜드가 가진 소재의 탁월함 등을 선보이는 데 주목했다”고 했다. 이번 시즌 컬렉션에서 작은 단추 디테일을 신경쓴 것도 이 때문이다.
의상 디자인을 할 때도 ‘빛’에 집중했다. 한지 조명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을 옷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옷들은 소재 덩어리로 움직이는데, 나의 옷은 주름을 따라 분해되고, 입은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음영이 생긴다"고 했다. 원단과 소재마다 다르게 주름을 잡은 것도 모두 움직임과 빛을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권중모는 "그래서 내 르베이지 컬렉션은 사람이 입어야 비로소 완성작이 된다"고 했다. 움직임이 없는 사진이나 마네킹으로는 빛이 만들어내는 옷의 매력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르베이지와 함께한 의상 디자인은 권중모의 작업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됐다. 그는 "의류 디자인 프로세스가 다른 장르보다 훨씬 빠르다는 걸 알게 됐다"며 "시즌마다 발빠르게 트렌드를 따라가고 고민하는 과정이 새로웠다"고 했다. 한 시즌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시즌을 준비한다. 디자인 구상에서 옷이 나오기까지 6개월이 걸리기 때문이다.
힘들고 정신없는 작업을 겪으면서도 권중모는 패브릭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언젠가 천으로 뭔가를 해보게 된다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에게 있어서는 영역의 확장이었다”고 했다. 이어 “내 인생에서 상상도 해본 적 없던 패션과의 협업을 순탄히 하며 나의 디자인을 적용하는 과정에 대해 배운 게 많다”고 말했다.
그는 르베이지와의 프로젝트를 통해 ‘퀘스트를 깬다’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고 했다. 권중모는 “게임에서 미션을 깨듯 새 영역을 깨나가는 게 즐겁다”며 “꿈은 크게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도호와 박서보 등 평소 좋아하던 거장들처럼 멋진 작가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또 작가로서 욕심도 생겼다. 그는 “지금까지 해오던 건 당연히 계속할 테지만, 다른 영역에 조금씩 욕심이 생긴다”며 “천천히 계속 발전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