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상법개정안, 기업 밸류업 위한 처방 아니다

곽관훈 한국경제법학회장·선문대 교수
아픈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증상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에 맞는 처방이 이뤄져야 한다. 진단과 처방이 잘못되면 병이 악화하고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법·제도를 개선할 때도 동일하다.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그에 맞는 처방이 필수적이다.

최근 우리 기업의 밸류업을 위한 처방으로 상법개정안이 제시되고 있다. 가장 많은 관심을 끄는 것은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 의무’ 도입이다. 기업의 물적 분할, 합병 과정 등에서 소액주주 이익이 침해되는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 의무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사에게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부과하면 주주 이익이 보호될 수 있다는 것이다.일단 법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주장이다. 우리나라 법에서는 법인인 회사와 이사를 위임 관계로 보고 있다. 즉, 회사가 이사를 선임해 사무 처리를 위탁했으며 이사는 회사 이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의무를 부담한다. 이를 선관주의 의무라고 한다. 미국 법의 주의 의무와 충실 의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다수 견해다.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 부과는 이런 법적 논리를 간과하고, 위임 관계가 아닌 주주에 대해서도 의무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법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처방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도 주주에게 손해가 발생하면 이사는 주의 의무 또는 충실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본다. 회사의 이익이란 결국 주주 전체 이익과 일치한다는 것이 학설과 판례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별도로 규정한다면 충실 의무의 대상이 되는 주주 이익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아 법적 안정성을 해친다.

충실 의무 도입 외에도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전원 분리 선출, 독립이사제 및 전자주주총회 도입 의무화 등 다양한 처방이 나온다. 이들 처방은 오래전부터 제기돼온 것으로 효능에 의문이 있지만, 무엇보다 그 전제가 되는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 지배주주 또는 경영진으로부터 독립된 자만 있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이다.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전원 분리 선출, 독립이사제 도입, 전자투표 제도 등은 모두 지배주주로부터 독립된 자를 선임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지배주주로부터 독립된 경영진이 있으면 지배구조가 쉽게 개선될 수 있을까?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수많은 인력과 조직으로 구성된 기업의 밸류업을 위해서는 기업에 맞는 경영 시스템과 내부 통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업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일률적 규제로는 절대 기업의 밸류업을 유인할 수 없다. 기업 가치를 높이는 올바른 처방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