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퍼의 고독이 스페인의 태양을 만나 찬란하게 부서지는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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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허남웅의 씨네마틱 유로버스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 외로운 미국인의 초상을 담았다고 평가받는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태양이 내리쬐는 스페인 출신답게 스크린에 붉은색을 채색하기를 즐기고 각종 팝 문화, 특히 미국 대중문화의 요소를 액션 페인팅하듯 배치하여 화려하고 생명에 관한 열의가 넘쳐난다는 인상을 준다.시그리드 누네스의 소설 <어떻게 지내요(What Are You Going Through)>을 원작으로 한 알모도바르의 <룸 넥스트 도어>에도 각종 문화에 관한 언급과 인용이 넘쳐난다. 잉그리드(줄리안 무어)와 마사(틸다 스윈튼)는 1980년대 젊었을 적에 잡지사에서 기자와 사진기자로 함께 일하며 친하게 지냈다. 서로 연락이 끊긴 건 마사가 종군기자로 세계 각지를 돌면서다. 그동안 잉그리드는 소설가로 유명해졌고 마사는 암에 걸려 연명하고 있는 처지다. 이 소식을 듣고 마사가 입원한 병원에서 잉그리드와 둘은 오랜만에 해후를 나눈다. 안부를 묻고 병세를 궁금해하고 회포를 풀면서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기자 출신답게 지적이어서 문학과 영화와 미술 등을 교차하는데 이에서 둘이 꽤 죽이 잘 맞는 친구였다는 사실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리뷰
제81회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시그리드 누네스의 소설 원작
함께 산다는 것의 가치를 관계로 풀어내
에드워드 호퍼 그림 속 외로움이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생명력 넘치는
스크린을 만났을 때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이들의 대화는 두서없지는 않고 하나의 맥락으로 이뤄진다. 죽음이 두렵다는 주제로 책을 쓴 잉그리드와 죽음에 굴복하기보다 안락사를 택하려는 마사에게 죽음은 최고 관심사이자 당면한 과제이다. 이에 마사는 죽음을 결심한 마지막 시기를 함께 해주지 않겠냐며 제안하고 잉그리드는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절친한 친구의 부탁을 끝내 거절하지 못한다. 뉴욕 도시를 떠나 한적한 시골의 집에서 마사와 잉그리드는 각자의 방을 잡고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죽은 사람들 The Dead>과 이를 영화화한 존 휴스턴의 작품을 읽고 보며 곧 닥칠 죽음에 슬퍼하고,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의 관계를 다룬 로저 루이스의 <성적인 부랑 생활 Erotic Vagrancy> 책을 공유하며 살아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찬양한다. 이제는 누릴 수 없는 것을 향한 회한이 이들 대화의 기저에 흐르는 가운데 마사와 잉그리드가 머무는 시골집에 걸려 있는 그림 한 점이 뭔가 다른 오라를 불어 넣는다. 에드워드 호퍼의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 People in the Sun>이다. 마사는 이 그림을 보자마자 진품이냐며 의문을 드러낸다. 당연히 모작이다. 중요한 건 이 그림이 전시하고 있는 이미지의 실현 여부다.
진품에 관한 마사의 의문은 실은 중의적인 것으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의도에 따르면 그림 속 내용을 표적으로 한다.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은 다섯 명의 인물이 각자의 선베드에 누워 옹기종기 일광욕하는 풍경을 담고 있다. 외로운 느낌이 강한 에드워드 호퍼의 다른 작품과 다르게 함께 있다는 감정이 주는 일말의 따뜻함이 그림 속 햇살을 우회하여 전해진다. 마사와 잉그리드가 지내는 시골집 테라스에도 선베드가 놓여 있다. 나란히 놓인 형태가 심상치 않다. 용감하게 안락사를 결정했지만, 그래도 마사는 누가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이 두려운 감정을 완전히 휘발시키는 건 아니라서다. 잉그리드의 입장에서도 이는 살인 동조에 해당해서 문제가 될 수 있어도 친구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다.
함께 한다는 것의 가치를 옆에 있는 관계로 풀어 가는 <룸 넥스트 도어>는 제목과 다르게 극 중 마사와 잉그리드가 묵는 시골집에서의 위치는 2층과 1층으로 나란히 붙은 구도가 아니다. 죽음의 상황을 공유해도 마사가 죽는 순간 잉그리드가 옆에서 지켜보지는 않는다. 안락사를 실행하기 전 마사는 문을 닫기로 했고 잉그리드는 이를 죽음의 신호로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다. 그럼에도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제목을 '룸 넥스트 도어'로 지은 이유가 있다. 죽음은 남은 이들의 삶에 여파를 미치기 마련인데 마사가 세상을 떠난 후 잉그리드를 찾아오는 이가 있다. 마사의 딸(틸다 스윈튼 1인 2역)이다. 마사가 살아 있을 적 둘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 베트남에 참전했던 마사의 전 남자 친구이자 딸의 아빠가 정신적 후유증으로 딸의 존재를 알기도 전 떠나버린 게 원인이다. 종군기자로 일했던 까닭에 가까이서 딸을 돌볼 수 없었던 마사는 그래서 아빠와의 사연도 전할 수가 없었다. 딸은 홀로 남겨지고, 버려졌다는 감정으로 마사와 잘 지낼 수 없었고, 태생과 관련한 마른 우물과 같은 깊은 외로움에 사무치는 삶을 살았을 거로 추정된다. 이를 모를 리 없었던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딸과의 사연을 공유해 죽음 이후의 간접적인 화해를 도모했다. 어떻게?
잉그리드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잉그리드는 마사의 딸임을 직감한다. 마사와 함께했던 집을 찾아온 딸을 위해 잉그리드는 그간의 사정을 전한다. 그제야 딸은 마음속 빈 우물에 물이 채워져 촉촉해진 감정으로 그동안 혼자라는 고립감에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어느 정도는 보상받게 됐다. 비록 엄마 마사와 아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관련해 궁금한 게 생기면 잉그리드가 도움을 줄 거고 그로 인해 위안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은유의 이미지처럼 잉그리드와 마사의 딸은 햇볕 쬐는 테라스의 선베드에 나란히 자리를 잡는다.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의 에드워드 호퍼와 알모도바르는 각각 외로움과 생명력을 키워드로 하고 있어 언뜻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내외했던 모녀가 화해로 서로를 이해하고, 삶과 예술이 서로에 영향을 미치듯, 두 작가의 영혼은 영화를 매개로 교류한다. 그리고 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룸 넥스트 도어>는 최고상의 영예를 안았다. 허남웅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