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밤 한강 노들섬에 울려퍼진 카르멘의 자유를 향한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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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노들섬 클래식 오페라 리뷰Libre elle est née et libre elle mourra !
추운 날씨에도 가족 단위 관객 줄지어
4막을 100분으로 압축,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각색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카르멘으로 주체적 캐릭터성 부각
나는 자유롭게 살아왔고, 죽음도 자유롭게 내가 선택한다!
프랑스 작곡가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서 여주인공 카르멘은 이렇게 외친다. 지난 20일 서울 한강 노들섬 잔디마당에서 펼쳐진 카르멘에서, 그 절절한 대사는 가을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다.180분짜리 4막을 100분으로 줄인 무대였지만 현장을 찾은 관객들의 감동은 결코 작지 않았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으로 추운 날씨에 열연한 성악가들을 격려했다.
오페라 카르멘은 비제의 생전 마지막 작품으로, 음악적 능력이 집대성된 걸작으로 여겨진다. 1875년 3월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돼 지금까지도 전세계 유수의 무대에서 공연되는 작품이다. 스페인 남부 세비야의 담배공장과 투우장, 선술집을 배경으로 집시 카르멘과 군인 돈 호세의 사랑과 비극이 펼쳐진다. 카르멘을 향한 돈 호세의 사랑이 집착으로 변화하는 게 이야기의 줄거리다. 그 당시 오페라극의 여성 캐릭터와 다르게 입체적으로 여주인공을 표현했다. '팜므파탈' 오페라라고 불리기도 한다.
타이틀롤 집시 카르멘 역에는 메조소프라노 정주연이 출연해 처음 맡은 큰 배역에 실수 없이 노래했다. ‘하바네라’로 유명한 아리아 ‘사랑은 길들일 수 없는 새(Lamour est un oiseau rebelle)’를 부를때는 요염한 동작과 함께 하바네라의 매력을 드러내기보다 발성에 집중해 가창에 열중하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였다. 공연을 보던 한 오페라단 단장은 “장래가 기대되는 젊은 메조소프라노의 반가운 등장”이라고 평했다.오디션 프로그램 팬텀싱어로 얼굴을 알린 테너 노 존은 돈 호세 역으로 출연해 마이크를 타고 나오는 미성으로 노래하며 전막 오페라에 데뷔했다. 그는 특유의 비성으로 프렌치 오페라의 딕션을 잘 소화해 노래했으며 극 중 돈 호세가 부르는 아리아 ‘꽃노래(La fluer que tu m’avais getée)’의 마지막 클라이막스 Bb음정의 고음을 낼때는 프랑코 코렐리, 호세 카레라스, 요나스 카우프만 등 세계적인 테너가 선택한 ‘메자 디보체 창법’이 아닌 팔세토 피아니시모로 고음을 소화했다. 마이크를 타고 전달되는 노 존의 창법은 음향이 열악한 야외 오페라에서 최선의 선택이었다.이번 작품의 연출을 맡은 오페라 연출가 김숙영은 테너 노 존에 대해 연출가 입장에서 만나기 힘든 성악가라며 공연 준비 기간동안 연기와 감정에 대한 대화를 할때마다 흡수하는 ‘질 좋은 스펀지 같은 테너’라며 그를 치켜세웠다. 에스까미요(토레로) 역의 바리톤 정승기는 독일 오페라 무대에서 경험을 쌓은 연륜이 보이는 무대를 보여줬다. ‘투우사의 노래(Toreador song)’를 노래하는 순간 풍절음이 마이크를 타고 들어와 스피커로 재생되기도 했지만 야외 오페라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낭만적인 소음으로 들렸다.
한강 노들섬의 나무들과 어우러지는 무대 디자인을 살리기 위해서였을까. 무대를 관통하는 강바람을 막기 위한 무대 뒷 배경막이 없었던 것이 음향적으로 핸디캡으로 작용했음에도 성악가들과 오케스트라는 현장을 찾은 서울시민을 위해 흐트러지 없는 모습을 보였다. 강바람과 추운 날씨의 열악한 여건 속에서 가창과 연기가 가장 돋보였던 성악가는 미카엘라 역의 김신혜였다. 3막의 아리아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Je dis que rien m’e epouvate)에서 작품의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선한 캐릭터인 미카엘라의 사랑을 위한 용기를 표현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것이 느껴졌다. 오페라 <카르멘>이 180분의 원작에서 야외 공연을 위한 100분으로 줄어 미카엘라의 분량이 준 것이 못내 아쉬웠다.
주니가 역의 베이스 박의현과 단카이로 역의 테너 위정민, 레멘다도 역의 테너 김성진 등 국내 오페라 무대에 빠지지 않는 명품 조역 성악가들은 추운 날씨에 경직된 객석 분위기를 달궈보려 런웨이 무대를 뛰어다니며 노래했다. 프라스키타 역의 소프라노 원상미와 메르세데스 역의 메조소프라노 김가영도 제 몫을 해냈다.이번 오페라 <카르멘>의 연출을 맡은 오페라연출가 김숙영은 무대전환이나 셋트의 변경에 제한을 갖는 야외 오페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오케스트라 피트를 애워싼 런웨이 무대를 활용하고 담배공장과 선술집을 무대셋트의 바깥과 안쪽을 회전무대로 돌려 활용해 총 3개의 공간으로 오페라 <카르멘>을 연출했다.
그는 “야외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성악가들의 눈빛까지 전달이 가능한 이머시브 무대를 활용하기 위해 오케스트라를 둘러 무대를 활용했다.”라며 덕분에 집시들의 은밀하지만 자유로운 공간과 긴 런웨이 무대의 투우장, 선술집까지 소화할 수 있었다고 무대 디자인과 연출에 대한 의도를 밝혔다. 제작 당시부터 궁금증을 자아낸 김숙영 연출의 결말은 4막에 나오는 카르멘의 대사 ‘나는 자유롭게 살아왔고, 죽음도 자유롭게 내가 선택한다’처럼 카르멘이 돈 호세의 칼에 맞아 죽지 않고 돈 호세가 들고 있는 칼로 자신을 찔러 죽음을 맞은 결말이었다. 살인이 아닌 자살로 최후를 맞았다.
이날 올 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보기 위해 많은 관객이 현장을 찾았다. 서울문화재단은 갑자기 하루만에 추워진 날씨에 대비해 모든 관객에게 핫팩을 두둑히 제공했고 노약자들에게는 무릎담요까지 챙겨주는 등 세심한 배려를 보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귀가하던 한 시민은 “한강을 배경으로 시민들에게 낭만적인 추억을 선사하기 위해 제작한 오페라 작품 선정이 아쉬웠다”는 말을 전했다. 야외 오페라 특성상 오페라를 처음 접하는 가족 단위 관객이 올 것을 감안해 외설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작품을 공연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일리가 있다.
조동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