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이삼열 한국장기조직기증원장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우리 의학계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 본다. 기초 연구 분야에서 적잖은 성과를 쌓아가고 있지만, 무엇보다 신장이식 등 한국의 이식 수술과 수술 후 생존율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한 점이 눈에 띈다.

1894년 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이 정적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끔찍한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젊은 의사 알렉시스 카렐은 이에 자극받아 혈관 문합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마침내 효과적인 혈관 문합술을 개발하게 됐다. 1906년 카렐의 선임 동료인 리옹의 매슈 자블레이가 사람의 신장이식을 처음으로 시도했다.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거부반응이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1936년 우크라이나의 보로노이는 사망한 60세 남자의 신장을 이용해 26세 여성에게 이식을 시행했다. 보로노이는 오른쪽 허벅지 혈관에 신장을 연결했고 노출된 부위는 피부이식을 했다. 이식 후 소량의 소변이 만들어졌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 그는 사망했다. 1950년 6월 미국 시카고 외과 의사 리처드 라울러는 간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의 신장을 적출해 44세 여성에게 이식했다. 다행히 혈액형은 일치했고 환자는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했다.

1952년 프랑스 외과의 진 햄버거는 낙상으로 신장이 파열된 16세 청년에게 이식을 시행했다. 공여자는 그의 어머니였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모자간 처음으로 생체 신장이식이 이뤄졌다. 어머니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이식 21일 만에 거부반응으로 아들은 사망하고 만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미국 보스턴 피터벤트브리검병원의 데이비드 흄은 프랜시스 무어 교수와 함께 아홉 차례 신장이식을 했다.

여덟 번째 환자까지의 결과는 실망스러웠으나 아홉 번째 환자는 달랐다. 환자와 공여자는 동일한 혈액형이었다. 흄은 환자의 오른쪽 허벅지 혈관에 신장을 문합했고 특별한 기구를 하나 추가했다. 이식 신장으로부터 환자에게 흡수돼 거부반응을 야기할 수 있는 항원의 유입을 방지하기 위해 플라스틱 백을 설치한 것이다. 그 효과 때문이었는지 81일째 환자는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했으나 수술 후 6개월째 사망했다. 1953년 흄은 한국전쟁 동안 군대 소집 영장을 받게 돼 어쩔 수 없이 잠시 이식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같은 병원에서 일하던 성형외과 의사 조지프 머리가 일란성 쌍둥이에게 성공적으로 신장이식을 한 것은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54년 12월 크리스마스 이틀 전이었다. 그 공로로 머리 교수는 199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