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하게 죽을 권리' 한걸음…정부, 해외 사례 검토 나선다

고령화 시대,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 요구↑
스위스, 벨기에 등 해외에선 조력사 도입도
정부, 해외 조력사 제도 관련 법제 분석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급속한 고령화로 '삶의 존엄한 마무리'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가운데 정부가 관련 제도와 해외 사례 검토에 나섰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넘어 의사의 도움을 받는 조력자살 등 적극적 조치의 국내 적용 가능성 등을 따져보고 사회적 논의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분석된다.

23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최근 '연명의료결정제도의 의료환경변화 대응 방안'과 '삶의 마지막에서 자기결정 존중을 위한 법제 분석'을 주제로 한 연구용역을 각각 발주했다. 첫 번째 연구는 치료 효과 없이 수명만 연장하는 연명의료의 중단을 보장하는 현행 연명의료결정제도에 대해, 두 번째 연구는 현재 국내에선 시행되고 있지 않은 조력자살의 외국 사례를 살펴보는 게 주된 내용이 될 전망이다. 두 연구 모두 연내 연구결과가 나올 예정이다.복지부 관계자는 "이번 연구용역은 정부가 연명의료의료결정제도 확대나 조력자살 관련 제도를 추진하겠다는 게 아니라 해외 사례를 정리하고 (사회적 논의를 위한) 정책 자료를 만드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이 같은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면서 '죽음의 질'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지고 있는 것과 연관이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36만명이었던 사망자 수는 50년 뒤인 2072년 69만2000명으로 두 배가량 증가할 전망이다.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고민하는 인구가 그만큼 늘어날 것이란 의미다.

이미 한국에선 2018년 2월부터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이는 19세 이상 성인이 작성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임종기 환자의 연명의료계획서를 토대로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의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 인원은 2018년 10만 명을 시작으로 해마다 꾸준히 증가해 작년에만 57만 명 이상이 작성했다. 올해 6월 누적 기준으로는 240만명에 달한다. 전체 작성자 중 65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75%를 넘는다. 65세 이상 인구 중에선 18.5%가 넘게 작성했다. 의료기관윤리위원회가 설치된 의료기관에서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담당 의사와 함께 작성하는 연명의료계획서는 지난 6월까지 누적 14만건 이상이었다.

실제로 연명의료를 중단한 환자 수도 꾸준히 늘고 있다. 연명의료를 중단하기로 결장한 환자 수는 2020년 5만4942명에서 2021년 5만7511명, 2022년 6만3921명, 2023년 7만720명 등으로 해마다 증가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연명의료결정제도 적용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가 지난 21일 연명의료결정제도를 주제로 발간한 '보건복지포럼-10월호'에서 조정숙 국가생명윤리정책원 연명의료관리센터장은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의 이행 시기는 현재 임종기로 국한돼 있다"며 "말기부터 가능하도록 이행 시기 확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일학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료법윤리학과 부교수도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을 통해 말기 이외의 비가역적 혼수, 식물인간, 중증치매 등 다양한 상황을 포괄할 수 있도록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해외에선 보다 적극적인 환자의 의지가 반영되는 제도도 운영되고 있다. 스위스를 비롯해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은 조력자살(조력존엄사)이 합법화된 나라다. 조력자살은 환자가 자신의 삶을 종결하기 위해 의사로부터 치명적인 약물을 처방받아 스스로 복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위스에선 조력자살이 전체 사망자의 2.1%를 차지하는데 말기 암 환자가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보사연에 따르면 스위스 내 조력자살은 대부분 디그니타스(Dignitas), 엑시트(Exit) 등 민간단체에 의해 이뤄지며 지난해 기준 디그니타스에 가입된 한국인은 162명으로 집계됐다.

국내 정치권에서도 조력사 제도화를 위한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7월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대상으로 조력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조력사를 도운 담당 의사에 대해선 자살방조죄 적용을 배제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조력존업사에 관한 법률안'을 내놨다.

다만 앞서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은 2022년 비슷한 취지의 법안과 관련해 "지금 연명의료 결정에 대해선 임종기에만 허용하고 있는데 말기, 식물상태, 치매 등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한 후 조력존엄사를 검토하는 것이 여러가지 갈등을 최소화하는 방향"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나타냈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