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에 걸린 카유보트 역작, 비 오는 날 파리의 그 거리를 가다 [2024 아트바젤 파리]

파리 오르세미술관 화제의 전시
대규모 회고전 ‘카유보트: 페인팅 맨’

사진적 사실주의로 담은 파리의 일상
초기 인상주의 작가 금전적 지원하기도
그날의 파리에도 비가 내렸을까. 부부로 보이는 중산층 남녀 한 쌍이 우산을 쓴 채 걷고 있다. 고개를 떨구고 걸음을 재촉하는 행인들은 저마다 수심에 잠긴 모습이다. 빗물에 빛이 반사되며 반짝이는 거리는 한 장의 사진처럼 생생하다.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카유보트 (1848~1894)의 역작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1877)이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1877). ⓒArt institute of Chicago
부슬비가 내리던 지난 19일 오후. 작품의 배경인 파리 북부 생 나자르역 근처의 더블린 광장을 찾았다. 화폭 가운데 그려진 건물 1층의 약국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부친한테 물려받은 약국을 40여년째 운영하고 있다는 프랭크 암살렘 씨는 작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카유보트는 파리 시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입니다.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도시의 모습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주변 작가들에 대한 금전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죠.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모네, 르누아르도 없었을지 몰라요.”
귀스타브 카유보트 <유럽교 위에서>(1876~1877년). ⓒ킴벨미술관
화가이자 미술품 수집가, 예술 후원자, 군인, 법학자, 요트 선수…. 카유보트한테 따라붙는 여러 꼬리표 중 일부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수식어는 단연 ‘파리가 사랑하는 화가’다. 지난 8일부터 프랑스 파리 오르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회고전 ‘카유보트: 페인팅 맨’ 입장이 아트 바젤 파리 주간 내내 조기 마감된 이유다.

카유보트의 타계 13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주요작 70여점을 선별해 걸었다. ‘페인팅 맨’이란 전시 제목은 우리말로 ‘남성들을 그리다’로 풀이된다. 작가는 근대화와 여성권 신장 운동이 맞물리며 남성성에 대한 기존 관념이 흔들리던 시기에 살았다. 부르주아 출신 화가이자 법학자, 스포츠맨이었던 작가가 본인의 정체성을 찾아 ‘남성’을 그려온 여정을 조명한 전시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회고전 ‘카유보트: 페인팅 맨’ 전시전경. /파리=안시욱 기자
카유보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군대에 직물과 침구류를 납품하는 사업체를 운영했다. 법학을 공부하던 그는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 때 군에 입대했다. 당시 군인은 강인한 남성의 표상이었다. 카유보트는 전쟁을 직접 묘사하진 않았지만, 1881년 만난 이름 모를 군인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187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화단에 뛰어들었다. 전통에 얽매인 ‘아카데미 예술’에 싫증을 느낀 그는 새롭게 떠오르던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했다. 카유보트는 집안의 재력을 바탕으로 이들의 작품을 사주며 후원하고, 전시 공간을 제공했다. 20대 때 일찌감치 본인이 세상을 떠나면 인상주의 컬렉션 수십 점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모네, 르누아르, 세잔 등 하나같이 수작들이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회고전 '카유보트: 페인팅 맨' 전시 전경. /파리=안시욱 기자
카유보트의 그림은 특별한 의미나 상징을 부각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듯 파리의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작가의 가족이 첫 번째 피사체였다. 1875년 작 ‘당구(Le Billart)’는 그림 왼쪽 부분이 미완성 상태로 비어 있는데, 일각에선 직전 해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를 위한 여백으로 추정하고 있다. 평범한 일상도 그의 손끝에선 예술로 다시 태어났다. 고급 아파트 바닥을 손질하는 노동자들을 그린 ‘대패질하는 사람들’(1875)이 단적인 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치인이나 군인, 상류층이 아닌 이들을 화면에 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정성껏 묘사한 대목에서 ‘보통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돋보인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대패질하는 사람들>(1875). ⓒ오르세미술관
이처럼 작가는 당대 서양화가들이 다뤘던 주제의 폭을 넓히는 데 한몫했다. 한가롭게 레저를 즐기거나 차담(茶談)을 나누고, 알몸으로 몸을 정돈하는 남성들도 그렸다. 강인한 남성성을 강조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를 미루어 볼 때 파격적인 소재였다.

카유보트는 본인을 어떻게 규정했을까. 작가가 말년에 남긴 자화상이 힌트다. 자산가로서의 정체성을 뽐낼 수 있는 고급 양복이 아니라, 요트 경주를 준비하는 소박한 뱃사람 차림이다. 아마추어 요트 선수로 활동하며 센강 곳곳을 캔버스에 담았던 그는 1894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45세. 불시에 찾아온 뇌졸중이었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자화상>(1892). ⓒ오르세미술관
그의 작업은 한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1950년대에 이르러 후손들이 그의 컬렉션을 꺼내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사진을 연상케 하는 독자적인 표현 기법과 폭넓은 주제 선정, 초기 인상주의의 성장을 견인했던 행보가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현재 그의 작품은 오르세미술관을 비롯해 미국의 아트인스티튜트 오브 시카고와 킴벨미술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

오르세미술관에서의 전시는 내년 1월 19일까지. 전시는 이후 2~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게티뮤지엄, 6~10월 아트인스티튜트 오브 시카고로 무대를 옮긴다.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1877)의 배경인 프랑스 파리 더블린 광장 일대 전경. /파리=안시욱 기자
파리=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