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일본 중앙은행 총재 “日 전자산업 몰락은 엔고 때문이 아니다” [서평]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시라카와 마사아키 지음
박기영·민지연 옮김/부키
744쪽|3만5000원
‘세계가 일본처럼 변하고 있다.’

이는 얼마 전까지 세계적인 화두였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걱정하고 있지만, 경기가 일찍 꺾인 유럽은 다시 디플레이션에 위협받고 있다. 중국도, 한국도 그렇다.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는 그런 점에서 눈에 띄는 책이다. 책을 쓴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2008~2013년 일본 중앙은행 총재를 지냈다. 글로벌 금융위기, 동일본 대지진, 유럽 국가 부채 위기가 연이어 벌어진 때였다. 1972년 일본 중앙은행에 들어간 그는 일본 경제의 거품과 붕괴도 목격했다. 현재 아오야마가쿠인대 특임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700쪽이 넘는 이 책에서 당시 일본 경제의 상황과 중앙은행의 대응, 그리고 그 경험들이 주는 교훈을 논한다. 박기영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와 민지연 한국은행 통화정책국 과장이 번역을 맡아 전문성을 더했다.
저자는 중앙은행가이지만 통화 정책과 환율 정책만으로 경제를 살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일시적으로 인공 호흡기를 댈 수 있지만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산업 경쟁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예컨대 그는 “일본 전자 산업의 몰락은 엔고 때문이 아니라 삼성전자나 LG전자에 뒤진 경쟁력 때문”이라며 “문제의 근원을 그대로 두고 금융 대책만을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 누구도 이를 반박하거나 거스르기 매우 어렵게 된다”고 했다. 이는 한국에도 교훈을 준다. 원화 가치를 낮추는 것이 당장 수출을 늘리는 데 도움은 되지만, 여기에 안주하면 장기적인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많이 담았다. 저자는 1980년대와 90년대 일본 경제의 거품과 붕괴는 기준금리를 올리고 내리는 타이밍을 못 맞춘 데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사실 일본 중앙은행은 1989년 5월 첫 금리 인상 훨씬 전부터 금리 인상을 준비했다. 그런데 1987년 10월 블랙 먼데이 사태로 중단됐다. 1988년 1월에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다케시타 노보루 일본 총리와 만나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 일본이 낮은 금리 기조를 이어 나간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런 정치적 압력에 금리 인상 시도는 또다시 무산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 벤 버냉키 미국 중앙은행 총재 등이 관련해서 책을 많이 썼다. 좋은 자료지만 주로 미국 입장에서 서술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반가운 책이다. 한국이 미국보다 일본과 비슷하다는 점에서도 우리가 눈여겨 볼 부분이 많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