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철수와 영희, 옛날 국어책을 기억하십니까?

[arte] 박효진의 이상한 나라의 그림책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나요?

듣고, 읽고, 쓰고!
오랜 시간 고민하고, 생각하는 시간의 필요성
"조용히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 언젠가는 우리가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인터뷰 내용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쾌거를 선물 받은 국민은 잔치 분위기에 들썩이고 있지만 정작 주인공인 한강 작가는 조용히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출판업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새내기로서 이번 수상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날 만큼 흥분되고 설레며 벅차오르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한강 작가를 수상자로 이끌게 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근원은 무엇인가. 작가가 살아왔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작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들, 꼭 거쳐올 수밖에 없었던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철수와 영희의 소환

지나가다 길모퉁이의 헌책방에 들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70~80년대 출간되었던 그림책들과 국어 교과서를 찾아보았다. 어디다 쓰려고 하느냐 묻는 헌책방 사장님에게 “그냥 한번 보고 싶어서요.”라고 하자, 눈썹을 씰룩거리며 사다리를 타고 오르신다. 빨간 노끈에 묶인 교과서를 내 앞에 척척 내려놓으신다. 축축하고 눅눅한 곰팡내와 오래된 종이 향내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엄기원 창작동화 <짚세기 선생님> / 사진출처. ⓒ SAYBOOKS Ltd.
검은 먹을 사용하여 일필휘지로 그려내려 간 별주부전의 토끼와 거북이의 역동적인 모습부터 네모 가방을 메고 바른 자세로 인사하는 철수와 영희의 모습까지 책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왼쪽) 1955년도 초등 국어 교과서 2-1 / 사진=필자 제공, (가운데) 1970년대 1학년 국어교과서 / 사진출처. © 한국교과서주식회사, (오른쪽) 초등학교 1-2학년군 국어 교과서(2022개정) / 사진=필자 제공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무질서한 헌책들 사이에 사람 하나 겨우 들어설 수 있는 공간. 코끝을 자극하는 습한 오래된 냄새는 잊히고 점점 옛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특히 옛 교과서를 볼 때는 우리 반의 철수와 영희, 교실의 냄새, 운동장의 모래 냄새들이 소환되었다.

기름종이를 덧대어 그 위에 따라 쓰기란 예쁜 글씨, 동시 옆에 1연, 2연 나누어 적고, 따옴표와 쉼표에 정성스레 동그라미를 한 페이지까지 이 교과서의 주인은 지금 어떤 세상을 살고 있을까. 모든 교과서가 전자교과서로 전면 교체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지금, 점점 더 기억 속에서 사라져갈 옛 교과서의 모습이 더욱 귀하고, 간절하게 느껴졌다.
옛 교과서의 모습 / 사진=필자 제공
옛 책의 내용 중에는 피식 웃음이 나지만 지금 출간되면 논란이 될 만한 문구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지금보다는 더 많은 표현이 허용되고 쓰였던 시기였으리라.
옛 교과서의 모습 / 사진=필자 제공
예전 국어 교과서는 국어, 읽기•말하기, 쓰기로 나뉘어 있었다. 현재 교과서는 국어와 국어 활동지 2가지로 나뉜다. 붙임딱지, 여러 번 덧쓸 수 있는 투명 아크릴판이 기름종이를 대신하고 있고 알록달록한 색깔의 삽화와 활동지 등 권 수는 줄어들었지만, 더 다양하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반면, 쓰기는 예전 교과서에 비해 아쉬운 부분들이 많았다. 시대적인 교육의 추세와 AI 및 자동화 시스템에 맞추어 편리하고 쉽게 배울 수 있는 구조로 변화하고 발전해 간다고 하지만 예전보다 쓰기에 대한 교육이 더 나아졌는가에 대한 고민은 해보아야 할 것이다.
초등학교 1-2학년군 국어 교과서(2022개정) / 사진=필자 제공
사실 초등학교 수업 시절 쓰기를 할 때면 한 문장 한 문장 써 내려가는 일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한 문장 겨우 쓰고 나면 그다음이 또 고민이 되고, 울며불며 쓰기 싫다고 떼를 쓰며 숙제해 갔던 기억, 글씨가 개발새발이구나 혼나며 다시 지우고, 또 지우고 반복해서 썼던 기억, 하기 싫어서 울다가 젖은 갱지가 뚫어져 다시 붙여서 써 내려갔던 기억들…. 그때는 그 모든 것들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냥 싫었었다.

하지만 그 괴로웠던 경험들이 이젠 나의 원동력이다. 말 한마디, 글 한마디 쓸 때 괴롭지만 한 번 더 고민하고,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 글 한마디도 귀 기울여 듣고 보게 된다. 여러 번 써보고 지우고 다시 적어 본 경험을 해보았기에 알고 있다. 그 말의 힘, 글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작가가 겪어왔던 시대상, 수많은 한 문장의 고뇌, 괴로움, 상실의 산물이다. 작가가 가진 고유의 창의적인 혼과 노력이 뒷받침되었다. 70~90년대를 지나오며 동시대 아이들과 함께 시대를 겪어온 작가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때는 틀렸다고 생각했던 고뇌의 시간이 틀린 것이 아니라 옳은 시간이었다.

어른이 돼서야 그때의 시간이 맞다고 하지만 이제는 틀린 것들이 되었다. 아이들의 쓰는 시간, 읽는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어 가고 있다. 아이들에게 쓰는 시간은 우리가 느꼈던 괴로움의 배가 되었다. 한 문장을 놓고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생각하는 할 수 있는 시간을 여유롭게 가질 수 있는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국 문학계에 밝은 길이 열렸다고 입을 모아 말하지만, 문해력 저하와 한글의 위기가 대두되는 현시점에서 앞은 현탁 하기만 하다. 구닥다리처럼 보이는 옛 교육 방식과 길을 잃은 듯 한참 돌아가는 것만 같았던 읽고, 쓰고, 말하는 수업들이 지금은 절실하게 느껴진다.

얼마 전 자동으로 연필을 깎아주던 기계가 또 고장이 났다. 많은 후기를 보고 신중히 고른 상품이었지만 어김없이 멈추었다. 어렸을 때 철컹 철컹 매일 돌리던 기차 모양 연필깎이를 샀다. 아이들이 많이 쓸수록 연필이 닳아갈수록 기분이 좋다. 한 글자, 한 문장 정성스레 고민하고 힘들어하며 쓰는 모습에서 나의 과거를 찾아간다.한 그림책이 닳아질 때까지 펼쳐보고, 교과서에 구멍이 날 때까지 쓰고 지워보는 경험을 하는 아이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박효진 길리북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