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비었던 소나무 고개, ‘이건희 컬렉션’ 만나 잃어버린 ‘시간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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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부 가칭 송현동 국립문화시설 국제설계공모 당선작 발표서울 송현동은 광화문과 북촌, 인사동을 잇는 연결고리다. 청와대와 경복궁 등 역사유적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을 중심으로 내로라하는 갤러리들이 늘어선 ‘한국미술 1번지’ 삼청동과 외국인 관광객이 즐겨 찾는 쌈지길까지 손쉽게 오갈 수 있는 지름길이 되는 동네다.
제제합건축사사무소 ‘시간의 회복’
그런데 이 금싸라기 같은 공간은 오랜 세월 동안 제대로 쓰인 적이 없다. ‘소나무 고개(松峴)’라는 이름 뜻 그대로 조선시대엔 궁궐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 소나무 숲 구릉지였고,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엔 안동김씨 등 세도가와 일본인이 거주할 수 있었다. 해방 후엔 미국대사관 사택으로 쓰이다 1990년대 들어서야 겨우 민간에 개방됐지만, 각종 개발계획이 막히며 오랫동안 펜스에 가로막힌 채 잡초 무성한 땅으로 방치됐다.송현동 이건희 기증관 이름은 ‘시간의 회복’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기증한 ‘세기의 컬렉션’으로 불리는 미술품과 문화재를 전시할 이건희 기증관(가칭 송현동 국립문화시설)의 이름이 ‘시간의 회복’으로 결정된 이유다. 개인의 사유물에서 모두의 공유물로 전환된 값진 기증품을 매개 삼아 다시 대중의 품으로 돌아온 송현동 땅에 세대와 시간을 초월하는 연결이 발생한다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건축가협회는 25일 송현동 국립문화시설 국제설계공모 당선작으로 제제합건축사사무소의 ‘시간의 회복’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문체부는 이건희 회장 유족이 기증한 기증품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이건희 기증관으로 알려진 수장·전시시설 건립사업을 추진하며 설계공모를 진행해 왔다. 국내외 67개 팀의 작품이 접수된 가운데 지난 15일부터 일주일간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회를 통해 최종 당선작을 결정했다.‘시간의 회복’은 경복궁을 비롯한 한국 전통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정형 패턴(건물 내부 중앙이 비어있는 형태)을 적용한 3개의 건물로, 5개의 상설전시공간과 1개의 특별전시공간으로 구성된다. 심사위원들은 관객들이 전시 공간을 이동하는 동안 자연을 다시 만나는 열린 공간의 구성이 우아하다는 평가를 내리며 만장일치로 이 설계안을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통적인 중정형 패턴이 적용된 3개의 매스(공간을 점유하는 덩어리)로 구성된 기증관이 일종의 ‘사잇공간’으로 도시의 흐름을 되살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21일 열린 설계공모 2차 심사에서 건축가는 “경복궁과 한옥마을 등 역사성을 연장하고 사라졌던 기억을 되살려 시민을 위한 장소로 전환한다”는 의미를 제시했다.“소나무로 보여준 대한민국 사상적 정신”매스마다 한국 전통의 차경(借景·경치를 빌림) 개념이 살아 있다. 북측매스 중정엔 소나무숲을 재현하고, 남측매스 상부는 오랜 시간 닫혀 있던 송현동 땅을 치유하는 의미로 자연광으로 이뤄진 전시공간이 자리 잡는다. 중앙매스는 지역 일대와 인왕산을 한눈에 마주하는 전망 데크가 마련돼 송현동을 중심으로 지역 일대를 하나로 묶는다. 특별전시공간은 시간의 숲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이 돋보이는 공간인데, 전시를 감상하고 나면 서울 인왕산의 파노라마 풍경을 마주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기증품을 감싸는 전시관 외피에 송현동 땅의 이름을 살린 소나무를 활용하는 것도 재밌는 지점이다. 국내산 소나무를 활용한 탄화목 외관이 적용되는데, 건축가는 “부드러우면서도 절개 있는 텍스쳐(질감)를 지닌 검은 목재가 기억 속 소나무 언덕과 오늘날 송현공원과의 연결고리를 한다”면서 “그을린 외관을 통해 밝을 수만은 없었던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은유한다”고 소개했다. 전체적으로 절제된 조형미가 돋보이는데, 이는 44억원 수준인 설계비에 맞춰 기증관에 본질적 목적에 부합하는 디자인을 만들었단 설명이다.문체부에 따르면 오는 11월부터 설계를 시행해 내년 12월 착공, 2028년 개관한다는 계획이다. 문체부는 11월1일부터 당선작을 포함해 2~5등을 한 작품을 송현동 건립 현장에 전시한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