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 에곤 실레를 선택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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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표지 장식한스산한 하늘 아래, 낮게 뜬 해가 희미한 온기를 비추는 벌판에 나무 네 그루가 서 있다. 나뭇잎을 거의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 한 그루가 유독 눈에 밟힌다. 스물여덟 살에 요절한 천재 화가 에곤 실레(1890~1918)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그린 풍경화 ‘네 그루의 나무’(사진)다.
에곤 실레 '네 그루의 나무'
그림 속 나무 주인공 영혜 상징
문화예술계 전반에 ‘한강 신드롬’이 거세게 이는 가운데 소설가 한강(54)의 대표작 <채식주의자> 표지를 2007년부터 2022년까지 15년간 장식한 이 그림도 함께 조명받고 있다. 이 작품은 가로 141㎝, 세로 110.5㎝ 대형 풍경화로 오스트리아 빈 벨베데레 궁전이 소장하고 있다.그림은 책 표지 앞뒷면에 걸쳐 있다. 출판사 관계자는 “작가가 직접 실레 작품을 표지 이미지로 골랐다”며 “2022년 개정판을 내며 이옥토 작가의 사진으로 표지를 바꾸긴 했지만, 이 표지일 때 작품이 맨부커상을 받은 만큼(2016년) 문학 애호가에게는 ‘채식주의자’ 하면 여전히 떠오르는 이미지”라고 말했다.
한강이 실레의 그림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실레의 삶과 작품 세계 전반을 알면 그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다. 실레는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다. 강렬한 선으로 고독이나 욕망 등 청춘의 감정들을 표현해 ‘청춘의 아이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요절한 탓에 화가로 활동한 경력은 10년 남짓에 불과하지만 그 짧은 기간 누구보다 강렬하고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후 100년이 지난 그가 지금도 전 세계인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이유다.
실레의 작품 중 대중적으로 유명한 건 대표작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을 비롯한 자화상과 초상화 작품들. 하지만 눈 밝은 이들은 그의 식물 그림과 풍경화에도 강한 끌림을 느낀다. 자연을 그릴 때도 실레는 자신만의 철학과 화법을 담았다. 그는 1913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자연을 그대로 베끼는 데생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영혼의 울림을 듣고, 우수(憂愁)의 느낌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가 1912년작 ‘시들어 버린 해바라기’에서 꽃을 앙상한 노인처럼, 1911년작 ‘가을 나무 1’에서는 고통받는 인간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나뭇가지들을 그린 이유다.
그림 속 나무들은 소설 주인공 영혜의 변화를 비추는 상징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한강이 악뮤(AKMU)의 노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를 듣고 눈물을 흘린 것처럼, 실레가 그린 ‘네 그루의 나무’가 담고 있는 정서적인 고통과 시적인 서정성에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며 “작중 영혜는 채식을 하며 점차 나무처럼 육체와 영혼이 말라간 끝에 나무 그 자체가 되려고 하는데, 그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한강의 소설과 실레의 그림은 공통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성수영/신연수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