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흥행 부진속 '작은 신화' 쓰고 있는 독립영화 '장손'

오정민 감독

대가족의 세속적인 풍경을 담담히 포착
한국영화의 미래는 독립영화, 조용한 흥행몰이
한국영화가 연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설날 연휴, 크리스마스와 함께 한국영화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꼽히는 올해 추석에도 <베테랑 2> 한 편의 영화가 개봉했을 뿐이었다. <베테랑 2>는 다행히 750만에 가까운 관객 수를 기록하며 흥행작으로 남게 되었지만 이후 개봉한 한국영화들은 손익분기점에 훨씬 못 미치는 성적을 보여주고 있는 상태다.
영화 '베테랑2' 700만 달성 축하 사진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지난 10월 16일에 개봉한 <보통의 가족>(허진호) 은 손익분기점이 150만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31만을 기록했으며 이어 17일에 개봉한 <더러운 돈에 손대지 마라>(김민수) 는 손익분기점이 공개되지 않았으나 개봉 10일 차 누적 관객 수 8만명을 약간 웃도는 스코어를 보여줌으로써 역시 손익분기를 달성하기에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한국영화의 적신호는 다만 제작 편수나 극장 스코어로만 감지되는 것이 아니다. <기생충>의 전 세계적 열풍의 시작점이었던 칸 영화제에서도 한국영화는 최근 들어 경쟁 섹션에는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그 외의 비경쟁 섹션에서 역시 편수가 줄고 있다. 현재로서도 그렇지만 앞으로의 전망을 생각하면 더더욱 암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 '기생충' 칸 영화제 참석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그럼에도, 이 난국에 희소식이 있었다면 재기발랄하고 수려한 독립영화들이 이 곳 저곳에서 꾸준히 관객을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9월 11일에 개봉해 현재까지 상영 중인 <장손>이 그런 작품 중 하나다. <장손>은 오정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이미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3관왕을 차지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던 작품이다. 한 달을 넘긴 상영 기간 동안 <장손>은 (현재 기준) 관객 수 2만 9천명을 기록했고, 여전히 (소소하지만) 그 만의 작은 신화를 이어 나가는 중이다.
영화 '장손'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장손>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에서, 특히 가부장을 목숨처럼 여기는 가문에서 장손으로 겪어야 하는 번뇌와 시름을 코믹하면서도 서정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가업으로 두부 공장을 운영하는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3대의 대가족은 조상의 제삿날에 모이게 되고, (어느 집이나 그렇듯) 가족들은 공장의 운영과 상속을 둘러싸고 ‘박 터지게’ 싸우기 시작한다.
영화 '장손'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이 전투의 키를 쥐고 있는 장손이자 영화감독을 꿈꾸는 ‘성진’(강승호) 은 두부 공장을 물려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할아버지는 분노한다. 가족들은 답을 찾지 못한 채 헤어진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손숙)가 돌아가시고 ‘병사’들은 다시금 모인다. 장례가 치러지는 내내 (어느 집이나 그렇듯) 이들은 또 다른 전투를 벌인다.

<장손>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가정의 99%에서 일어날 법한, 혹은 이미 일어났을 일을 그리는 현실 코미디 영화다. 굳이 ‘코미디’라는 표현을 쓴 것은 영화의 장르가 그래서가 아닌, 이 영화가 삶을 그리는 방법이 마치 1920년대 무성 코미디가 일상과 사람을 그리는 상황극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웃픈 ‘상황극’들은 그럼에도 불구하 순간적인 코미디적 설정으로 증발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진행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가족 구성원 각자의 배경과 서사는 상황극, 혹은 소동극의 (의도된) 경박함과 유쾌함을 초월하거나 전복하는 비극이자, 가족 전체의 역사다.
영화 '장손'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따라서 <장손>은 복합적인 영화다. 가족 시트콤의 외피 안에 들어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가족의 집합체이면서도 한국사의 단면이기도 하다. 이 작은 패키지 안에 가부장제에 대한 풍자와 군부 독재 시대의 상흔이, 그리고 세대교체의 아이러니와 가족 로맨스가 조화롭게 혼재다면, 이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프로젝트가 아닌가.
영화 '장손'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다시 산업의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독립영화의 기준에서도 촬영이나 미술에 있어서 꽤 풍부한 모양새를 보여주는 <장손>은 (총제작비 6억) 손익분기점 5만을 돌파해야 하는 영화다. 상업적인 승패에 있어 아직 2만의 관객을 더 만나야 하지만 그 길이 험난해 보이지 않은 것은 두 달여 간의 긴 상영 기간 동안, 이 작은 영화가 보여준 저력과 꿋꿋함 때문이다. 최근 한국영화의 하락에 있어 우리에게 초심이 필요한 단계라면, <장손>은 그 답 중 하나다.
영화 '장손' 포스터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장손' 메인 예고편]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