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하나만 택하라"…무역분열땐 세계 GDP 7% 증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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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세계 질서미국 대선이 5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차기 미국 정부에서 세계 경제가 한층 분열된 양상을 띨 것이라는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미·중 갈등이 격화하고 ‘경제가 곧 안보’라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기업들은 둘 중 한 시장만 고르라는 압박에 시달린다. 수출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한국 경제는 중간에서 어려운 선택을 요구받는 샌드위치 신세를 면치 못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 대선 D-5 (2) 분열되는 교역망
"美-中 사이 샌드위치 신세 전락"
韓, 최대 수출국 작년말 美로 역전
中 비중 18.9%로 여전히 높은편
반도체 장비는 44%가 中에 팔려
트럼프 "美에 직접 투자" 요구
동맹·인접국 공급망 생태계 '흔들'
IMF "세계 경제 성장속도 둔화"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韓
29일(현지시간) 워싱턴 정가에 따르면 민주당과 공화당은 대중국 노선으로 각각 ‘디리스킹(de-risking·중국의 위협 제거)’과 ‘디커플링(de-coupling·중국과의 결별)’을 제시했다.양당이 중국과의 거리두기를 강조하면서 한국 기업에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적잖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달 워싱턴DC에서 열린 경제안보 콘퍼런스에서 앨런 에스테베스 상무부 산업안보 차관이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제조하는 기업 세 곳 중 두 곳이 한국 기업”이라며 “이런 역량을 동맹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대표적이다. 중국에 팔든지 미국에 팔든지 둘 중 하나만 하라고 압박한 것이다. 반도체, 양자컴퓨터,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의 대중 수출을 통제하고 투자까지 금지하겠다고 발표한 미국은 이런 조치에 동맹국도 참여하라고 요구할 계획이다.
그러나 시장의 반쪽을 잃어버리는 것은 한국에 적지 않은 부담이다. 미국은 작년 말부터 한국의 최대 수출국(상반기 수출 비중 19.2%)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2위 수출국인 중국의 비중(18.9%)도 여전히 높다. 반도체 제조 장비는 전체 수출 물량의 44%가 중국에 팔리고 있다.
○마켓쇼어링 요구 거세질 듯
미국이 중국과의 관계 단절과 함께 미국 내 투자를 요구하는 것도 기업엔 부담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프렌드쇼어링’(동맹국 투자)뿐만 아니라 ‘니어쇼어링’(인접국 투자)에도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차기 미국 정부는 이와 달리 물건을 팔려는 곳에 직접 투자하라는 ‘마켓쇼어링’을 내세울 것으로 예상된다.특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본토 투자 외에 나머지는 모두 미국의 이해에 반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미국을 둘러싼 공급망 생태계’라는 개념이 깨지는 것이다.
민주당이 승리해도 방향은 비슷하다. 스티브 브록 미 해군성 장관 수석고문은 지난 17일 허드슨인스티튜트 콘퍼런스에 참석해 “지난 30~40년 동안 우리 경제의 (해상) 운송을 외주로 맡겨온 결과 해군 이외의 해양 역량이 전멸해 버렸다”며 “우리는 (한국 등의) 조선사를 설득해 미국 조선소에 투자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중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현지 생산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 정부 요구에 따라 테슬라가 내년부터 상하이에서 6인승 모델 Y를 생산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무역, 더 이상 성장동력 아냐”
25년간 공급망 관련 컨설팅을 해온 수미트 두타 언스트&영(EY) 파트너는 EY 조사 결과를 근거로 “세계 주요 기업의 60%는 공급망에 ‘상당한 변화’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 기업도 마찬가지로 미·중 갈등에 대응하기 위해 공급처를 바꾸고 있다”고 덧붙였다. 두타 파트너는 “중국이 경제 개방을 결정한 1991년 이후 30년간 주요 기업 공급망 담당자들은 생산비가 더 낮은 지역을 찾는 데 집중했다”며 “2020년 이후에는 비용이 더 들더라도 변화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고 위기 상황에서도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곳으로 공급망을 옮기고 있다”고 설명했다.미·중 갈등 격화와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 흐름은 결국 세계 경제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 무역 장벽을 높이는 규제의 가짓수는 2017년 무렵 500여 개에서 2022년 2800개 수준으로 급증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미·중 무역 갈등과 관련해 “무역은 더 이상 강력한 성장동력이 아니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IMF에 따르면 무역 분열은 국내총생산(GDP)을 세계적으로 최대 7%(현재 가치 기준 7조4000억달러) 줄일 것으로 추산된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