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불켜진 TSMC vs 근로시간 발묶인 韓…커지는 R&D격차

1분 1초로 뒤집히는 기술패권…"축적의 시간이 경쟁력"

"우리가 먼저 신기술 내놓자"
TSMC 자유롭게 밤샘근무 가능

모든 업종 주52시간 적용된 韓
한창 제품 개발할 때도 강제 퇴근

인력난 허덕이는 삼성·하이닉스
"R&D는 프로젝트 단위로 진행
일률적인 근로시간 규제는 무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반도체 경쟁력은 얼마나 오랫동안 집중력 있게 연구개발(R&D)에 매진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른바 ‘축적의 시간’ 없이 반도체 초격차는 불가능하다.”

정부와 여당이 이번주 발의하는 반도체특별법에 R&D 인력을 주 52시간 근로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가 빠졌다는 소식에 박진섭 한양대 반도체공학과 학과장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은 반도체업계가 세제 혜택이나 현금 지원보다 중요한 사안이라고 강조하며 반드시 도입해달라고 요청한 터다. 반도체 경쟁력 확보의 핵심이 빠지면서 반도체특별법이 ‘앙꼬 없는 찐빵’이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축적의 시간이 경쟁력”

3일 대만 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 대만 근로자의 월평균 근로시간은 180.3시간으로, 지난해 한국 월평균 근로시간(1인 이상 사업체 근로자)인 157.6시간보다 22.7시간 많았다. 대만은 한국처럼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TSMC와 팹리스 강자 미디어텍 등이 자리잡은 ‘반도체 강국’ 중 하나다.

게다가 대만은 노동 유연성을 막는 경직적인 근무제도가 없다. 대만은 주 40시간제를 채택했지만, 노사가 합의하면 하루 근무를 8시간에서 12시간까지 늘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TSMC의 R&D팀이 하루 24시간, 주 7일간 가동되는 이유다. 초과근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스템 덕분에 TSMC는 바쁠 때는 R&D팀을 2교대로 돌린다.집중적인 R&D가 낳은 ‘축적의 시간’은 TSMC 창업자인 모리스 창이 꼽은 성공 비결이기도 하다. 모리스 창은 “TSMC 연구원은 새벽에 출근한 뒤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고, 오후에 다시 회사로 나온다. 가족도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 테크기업도 마찬가지다. 애플은 아이폰 개발팀을 격년 주기로 돌리며 제품을 한창 개발하는 1년6개월은 강도 높게, 시제품을 검증하는 6개월은 여유를 두고 근무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미국이 연봉 10만7432달러 이상 고소득자는 주 40시간제를 적용하지 않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를 운용하고 있어서다. 일본도 주 40시간제를 도입했지만 연소득 1075만엔 이상 고소득 전문직은 근로시간을 규제하지 않는다.

“한국만 낙오될 수도”

반도체특별법에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가 빠지면서 세계적으로 불붙은 ‘반도체 전쟁’에서 한국이 낙오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2018년 도입한 주 52시간제가 모든 업종, 모든 사무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연구원도 꼼짝없이 이 규제를 받고 있어서다. 업계 관계자는 “한창 제품을 개발해야 할 때도 늦은 밤이나 주말에는 연구동 주차장이 텅 비곤 한다”며 “경쟁자들은 뛰는데 한국만 기는 꼴”이라고 말했다.이로 인해 지난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R&D에 각각 28조3527억원과 4조1884억원을 투입했지만 여전히 인력 확보와 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23년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KEIT)의 산업기술수준조사에 따르면 차세대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의 기술 수준은 최고 기술국 미국(100점)보다 낮은 86점에 불과했으며 이는 유럽(90.9점)과 일본(88.8점)보다 낮은 수준이다.

승자 독식 구도로 바뀌고 있는 반도체 시장에선 하루라도 신기술을 먼저 도입하는 역량이 1등과 2등의 승패를 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업계는 화이트칼라 면제제도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 엔지니어는 “R&D에 몰두하는 1분 1초가 누적돼 경쟁사와의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만큼 한국 엔지니어들에게 R&D에 최적화한 근무 환경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반도체협회 관계자는 “R&D는 프로젝트 단위로 진행되므로 결과를 얻으려면 특정 기간에 집중적으로 일해야 하는데, 이런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근로시간을 맞추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박의명 기자 uimy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