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호와 김재덕의 따로 그려 함께 올린 '사계', 그 절반의 성공

[무용 리뷰] 사계를 탄생과 소멸 아닌 '생명력'으로 전달
관객 울리는 음악은 일품…두 작품의 조화와 연결은 아쉬워
깜깜한 무대 위, 산등성이처럼 굴곡진 형체를 살펴보니 몸을 웅크린 채 한 데 모인 무용수들이었다. 싹을 틔우듯 조심스러운 몸짓을 시작하자 봄이 왔다는 것을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경쾌한 여름을 지나, 보름달이 높이 뜨자 무용수들이 원형으로 강강술래를 추었다. 이어 천을 휘두르는 무용수의 몸짓에서 매서운 한파가 느껴졌다.
76세 한국 전통춤 대가 국수호와 40살 현대무용가 김재덕. 두 사람은 지난달 31일부터 3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한국의 사계절을 무용(국수호·김재덕의 사계)으로 풀어냈다. 서울시무용단의 신작이기도 한 이번 공연에서, 봄과 여름은 김재덕이 가을과 겨울은 국수호가 고안했다. '국수호·김재덕의 사계'는 사계절을 탄생과 소멸 등의 묵직한 주제로 치환하지 않았다. 어부사시사의 윤선도처럼 자연에 대한 감상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듯했다. 그러면서 계절마다 몇몇 주요한 장면에서, 생명력과 생동감을 보여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기술적으로는 한국무용의 손사위 등 국수호 특유의 움직임과 추상화와 같은 김재덕의 몸짓이 섞이면서 나름대로 신선한 동작을 보여주기도 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연출에 빛나는 국수호의 관록과 김재덕의 에너지를 융합하고자 한 점도 서울시무용단의 새로운 시도여서 기대가 작지 않았다.
하지만 공연이 진행되면서 각 안무가의 스타일이 너무 진하게 드러나, 공연 내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한 부분이 간혹 눈에 띄었다. 특히 가을. 봄과 여름에서 느꼈던 원초적 생명력은 가을을 지나면서 수확과 공동체를 의식한 춤으로 갑자기 옮겨갔다. 강강술래나 일렬로 늘어서 부채를 들고, 연쇄적인 몸동작으로 춤을 이어가는 동작은 과거 무대의 한 장면처럼 진부했다.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을 기대했던 관객으로서는 아쉬웠던 부분이었다. 겨울에서는 다시금 추위와 칼바람에 맞서는 무용수들의 신선한 동작에 안도감이 들었다.

봄과 여름의 무대와 가을과 겨울의 무대가 더블빌(두 작품을 동시에 공연하는 것을 의미)처럼 느껴진 게 안무자들이 의도한 것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창작을 보완하고 대본, 연출, 음악의 모든 과정을 함께 구상했다고 한다. 이를 감안하면 맥이 풀리는 지점이 있었다. 무대 장치와 의상의 색을 최소화해 움직임으로만 사계를 표현했다지만, 필자의 입장에서 시간의 흐름을 매끄럽게 이어준 것은 무용이라기보다 음악이었다. 리듬을 강조한 현대 음악에 전통 악기와 소리꾼의 소리가 입혀져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를 건드렸다.

관객을 한 번 크고 묵직하게 울리는 음악이 큰 힘을 발휘했다. 움직임에 집중하도록 장식을 최대한 배제한 무대는 후반부 무용이 다소 밋밋하게 느껴지면서 연출에 좀 더 힘을 줬어도 나쁘지 않았을까.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