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雪)이 아니어도 즐길 것 천지인 삿포로..'예술의 숲'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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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최영식의 찾아가는 예술 공간삿포로는 홋카이도의 중심 도시로, 신선한 해산물과 라멘을 맛보려는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하지만 삿포로는 단지 미식 여행지에 그치지 않는다.영화 '러브레터'의 촬영지, 유명한 오타루 운하 등 다양한 명소들은 삿포로의 독특한 매력을 더한다. 삿포로의 풍경은 대도시 도쿄나 오사카와는 또 다른 매력을 자아낸다. 울창한 산림과 태평양의 푸른 자연이 어우러진 삿포로는 한층 여유로운 도시 분위기를 제공한다.
눈(雪)의 도시이자 미식의 여행지
그리고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곳, 삿포로
자연과 예술을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곳
삿포로 '예술의 숲'
70여 개의 조각 작품들이 야외에 설치,
미술관과 공예관도 자리하고 있어
프랑스 화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 특별전
내년 1월 5일까지
이곳에서 유독 돋보이는 장소가 있다면 바로 삿포로 예술의 숲이다. 삿포로는 도시 계획부터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중심으로 설계되었는데, 예술의 숲이 그 대표적 사례다. 1999년에 개장한 이 공원은 약 7.5헥타르의 넓이에 70여 개의 야외 조각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예술 작품들이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사계절마다 다른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공원에는 미술관과 공예관도 자리해 있다. 주로 홋카이도와 관련된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며, 방문객은 공방에서 예술가들의 작업을 가까이서 지켜보거나 직접 참여하는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다. 겨울철에는 '설피'라 불리는 전통 눈신발을 신고 눈 덮인 숲길을 걸으며 작품을 감상하는 체험도 제공된다. 유기농 재료를 사용하는 레스토랑과 숙박 시설도 마련되어 있어, 여유롭게 예술과 자연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현재 삿포로 예술의 숲 미술관에서는 프랑스 화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의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로트렉은 19세기 말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활동하며 도시의 밤과 카바레 문화를 생생히 그려낸 예술가다. 이번 전시는 그의 그래픽 작품을 중심으로 세계 최대급의 ‘필로스 컬렉션(The Firos Collection, 베린다와 폴 필로스부부가 설립한 아트 컬렉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25년 1월 5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전시의 핵심은 로트렉의 초기 소묘 작품을 중심으로 한 포스터, 판화, 사진, 개인 편지 등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약 300점의 자료다.
전시는 총 다섯 개 파트로 구성되어있다. 첫 번째 파트의 초기 소묘 작품들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유년기의 소묘 작품은 그가 왜 '선의 화가'로 불리는지 그 이유를 보여준다. 연필, 목탄, 펜 등 흑백 선으로 구성된 소묘는 로트렉 자신의 시선을 그대로 표현한 방식을 잘 드러낸다. 필로스 컬렉션에는 약 70점의 소묘가 전시 중이다. 소묘는 판화와 달리 세상에 단 하나뿐이기에 더욱 귀중하다. 두 번째 파트에서는 로트렉이 주로 활동했던 몽마르트의 댄스홀과 카바레에서 그린 작품들을 소개한다. 1880년대 이후 파리 교외의 몽마르트는 대규모 환락가로 변모하며, 이곳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은 화려한 도시문화를 상징하게 되었다. 저렴한 임대료 덕에 많은 예술가가 몽마르트에 아틀리에를 두었고, 로트렉 역시 1882년 이후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카바레와 댄스홀, 그 주변 인물들을 자주 그렸다. 이번 장에서는 당시 대중문화를 생생히 전달하는 로트렉의 ‘카페 콩세르(café concert)’나 극장 관련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세 번째와 네 번째 파트에는 로트렉의 출판물과 포스터가 전시되어 있다. 로트렉은 대중 풍자 주간지, 서적 ‘박물지(博物誌, Histoires naturelles)’, 미술 비평 잡지 ‘라 르뷰 브란슈(La revue blanche)’ 등 여러 출판 미디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그만의 판화 표현 방식을 탐구했다.‘리토그래프(석판화, Lithograph)’는 18세기 말 독일에서 개발된 기술로, 산업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컬러 리토그래프를 이용한 포스터 문화가 활짝 피어났다. 1890년대에는 ‘알폰스 무하(Alfons Maria Mucha)’,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등 많은 예술가가 포스터 제작에 참여했다. 로트렉도 1891년부터 1900년까지 약 30점의 포스터를 제작했다.
포스터는 주로 거리에 게시되는 특성상 대부분이 파손되거나 변색되어 원래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작품이 드물다. 하지만 필로스 컬렉션은 보존 상태가 우수한 작품들을 엄선해 수집했으며, 로트렉의 디자인을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감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문득,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었다. 아직 초등학생도 되지 않았을 법한 여자아이 하나가 로트렉의 작품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작은 체구로도, 두 발을 딱 붙이고 서서 말없이 작품을 응시하는 모습이 마치 어른 못지않게 진지했다. 아이는 작품에 다가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어른들조차도 이 아이만큼이나 로트렉의 작품을 이렇게나 즐겁게, 그리고 진심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혹시 로트렉의 예술적 영혼이 아이의 순수한 마음에 더 자연스럽게 닿은 것은 아닐까? 알파벳과 숫자가 아닌, 예술을 통해 세상을 느끼고 배우는 것이야말로 진짜 조기교육 아닐까? 영어 유치원보다도, 오히려 이런 작품과의 조우가 아이에게 더 오래도록 남을 큰 선물이 될 것이다. 문득 상상해 본다. 지금은 조그마한 손을 배에 모으고 작품을 바라보는 이 꼬마 숙녀가, 훗날 훌륭한 작가가 되어 이 자리에 다시 서는 모습 말이다.
마지막 파트에서는 작품 뒤에 숨겨진 로트렉의 사생활과 만년의 삶이 드러난다. 어릴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로트렉은 늘 고독 속에 있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전시된 작품과 전람회 초대장, 동료들과 지인들이 남긴 모습들을 보면,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서른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로트렉. 그의 사생활을 보여주는 다섯번째 코너에는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도 전시되어 있다. 짧은 글 속에서도 그의 인간적이고 따뜻한 마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가 그린 화려한 카바레와 환락가의 장면 뒤에는 이렇게 소박하고 내밀한 순간들이 있었다. 다섯 번째 파트에서는 그런 로트렉의 인간적인 면모를 마주하게 된다. 예술가의 삶에 대한 진한 공감과 애정이 자연스레 일어나는 순간이다.전시장을 나오는 순간에도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출구에는 ‘1896년부터 1900년까지의 파리 여행’이라는 영상이 상영 중이다. 방금까지 로트렉과 한층 가까워졌던 느낌이 영상 속에서 이어진다. 파리의 거리와 로트렉이 사랑했던 풍경들, 그 속에서 활약한 그의 모습이 영상으로 펼쳐지며 감동을 더 한다. 영상 속에서 파리를 걷고 있는 로트렉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로트렉의 화려한 도시 속 생동감 넘치는 장면들이 삿포로의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색다르게 재해석된다. 이번 전시는 장소와 문화를 넘어 예술이 어떻게 인간의 삶과 감정을 연결하는지를 탐구할 기회를 제공한다.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삿포로에서, 로트렉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이번 전시. 눈 축제와 더불어 삿포로 예술의 숲 미술관도 함께 방문해 보시길 바란다.
최영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