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간 쇳덩어리 주무르며 빚어낸 ‘코리안-아메리칸’의 삶

서울 종로구 현대화랑 김홍자 개인전
'인연의 향연' 11월 30일까지
작가 김홍자
“난 작품을 해야 빛이 나는 사람입니다. 낯선 미국 땅을 처음 밟고 혼란스러웠을 때도, 나이가 들어 세월의 야속함을 느낄 때도,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한 건 작업이었죠. 쉬면 오히려 더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집니다.”

1939년생, 올해로 85세를 맞은 금속공예가 김홍자는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60년간 매일 새로운 작업을 구상하고 은과 금, 동을 주무르고 깎아내며 새 작품을 탄생시킨다. 작업을 하지 않을 때면 교단에 나가 미래의 김홍자를 키워낸다. 그렇게 몽고메리칼리지에서 무려 42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미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김홍자가 오랜만에 한국 관객을 찾아왔다. 서울 종로구 현대화랑에서 여는 개인전 ‘인연의 향연‘을 통해서다. 그가 1994년 이후 30년 만에 현대화랑에서 여는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서 방대한 김홍자의 30년 작업 역사를 조명한다. 1990년대 작업부터 최신작까지 모두 한 공간에서 만나볼 수 있다.
현대화랑에서 열리는 김홍자 개인전 '인연의 향연'
김홍자는 이화여자대학교 자수과를 4학년 1학기에 그만뒀다. 그리곤 1961년 미국으로의 이주를 택했다. 인디아나대학교를 다니며 금속 공예의 세계에 눈을 떴다. 금속공예 석사 학위까지 받을 정도로 배우고 만드는 데 흥미를 느꼈다.

김홍자의 모든 작품을 지탱하는 주제의식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이다. 그의 작품에 동양과 서양 의 양식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홍자는 미국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면서도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영어 이름 '코멜리아 오킴'에서도 그의 자긍심이 드러난다. 코리아와 아메리카를 합친 이름 코멜리아에, 일본인인 남편의 성 오시로와 아버지의 성 김을 합쳐 성을 붙였다.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겠다는 의지를 이름으로 내비친 것이다.
김홍자, 봄의 행진, 2013.
이번 전시의 키워드는 인간과 자연. 김홍자가 세상을 돌며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자연이 이루는 조화로운 풍경을 상상하며 만든 작품들을 선보인다. '대부'라는 제목이 붙은 금속 작품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을, ‘대모‘ 작업에는 연못의 풍경을 세밀하게 조각해 그려넣은 것이 대표적이다.

천에 그림 등을 그려넣는 기법인 '텍스타일 페인팅'을 사용해 인간과 자연의 조합을 표현하기도 했다.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을 실크 위에 인쇄하고 캔버스 삼은 것이다. 천 앞에는 금속으로 만든 인간 형상 조각을 배치했다. 김홍자는 '조각 작품을 집에 걸어둘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 이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집 창고나 찬장에 조각 작품을 단지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걸어두고 매일 보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대화랑에서 열리는 김홍자 개인전 '인연의 향연'
그가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도 이와 닮아 있다. 김홍자는 “누군가 내 작품을 산다면 매일 곁에 두고 볼 만큼 애정이 가고,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매일 보더라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정이 드는 작품을 하는 것이 목표”라고 전했다. 거울을 이용한 조각 작업을 자주 하는 것도 관객을 개입시키기 위해서다. 스스로의 모습을 보는 통로인 거울을 활용해 관객이 자신을 비춰볼 수 있게끔 만들었다. 스스로를 보며 작품 속 주인공이 되는 셈이다.
현대화랑에서 열리는 김홍자 개인전 '인연의 향연'
그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항상 고국을 표현하기 위해 한국적 요소를 작품 안에 차용한다. 이번 전시에 나온 커피 주전자가 대표적이다. 한국 전통 무용수들이 한복 치마를 입고 춤출 때의 모습을 금속 주전자로 표현했다. 주전자 아랫부분에는 치마폭 자수를 연상시키는 패턴을 넣어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정형화된 금속 공예의 공식을 깨기 위한 김홍자의 노력도 엿볼 수 있다. 그가 이번 전시에 가지고 나온 은 그릇에서다. 흔히 은 그릇을 만들 때 모든 부분을 동그랗고 모나지 않게 조각하지만, 그가 만든 은 그릇은 끝부분이 모두 날카롭게 홈이 파이거나 접혀 있다.
현대화랑에서 열리는 김홍자 개인전 '인연의 향연'
모든 은 그릇은 작가가 완성작을 만든 후 끝을 자르고 파낸 뒤 땜질하는 과정을 거쳐야 나온다. 그 표면에 금박을 수백 장 붙이는 경우도 있다. 유황이 은을 만나면 검게 변하는 속성을 이용해 유황을 들이붓기도 한다. 완성작에 손을 대는 과정은 실패하기 일쑤다. 하지만 김홍자는 전형적인 틀을 깨기 위해 몇 번이고 시도하고 모양을 잡아낸다. 그만의 '작업 규칙'이다.

김홍자는 앞으로 '이모저모 쓸 수 있는 공예품을 만드는 작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 단지 어딘가 올려두고 보는 작품 대신 장신구 거치대, 유골함, 등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작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조형 작업, 도자에서부터 일상품까지 가리지 않고 작업을 펼치고 있다. 은, 금, 동 등 재료에도 제약을 두지 않는다. 이날 전시장에서 만난 김홍자가 착용하고 있던 모든 장신구도 그가 직접 만든 작품이었다. 전시에서는 그가 직접 만들고 착용하는 장신구도 감상할 수 있다. 전시는 11월 30일까지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