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외로움 속 우린 서로를 토닥이며 살아가지…뮤지컬 '이터니티'

[arte] 최승연의 뮤지컬 인물 열전

1960년대 록(Rock)의 새로운 장르로 등장한 글램록(Glam Rock)
뮤지컬 로 2024년에 다시 탄생하다!
블루닷과 카이퍼가 전달하는 치유와 위로의 감각

한국 뮤지컬에서 특히 자주 다루는 테마가 있다. ‘나는 너, 너는 나’로 압축할 수 있는 관계성 중심의 서사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한 인물의 인격을 복수의 캐릭터로 분리하여 대립하게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 인물이 하나로 합쳐지는 방향으로 발전되는 것이다. 두 방향 모두 뮤지컬의 극적인 심도를 높이는 서사적 패턴으로 자리 잡아 있다.
뮤지컬 <이터니티> 공연 / 사진제공. © (주)알앤디웍스
알앤디웍스(R&Dworks)의 2024년 신작 <이터니티>는 ‘나는 너, 너는 나’ 테마의 정점을 보여준다. 이번엔 블루닷과 카이퍼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는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지만, 그 무엇보다 강력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끈은 바로 글램록(Glam Rock)이다.

블루닷은 과거 1960년대 글램록의 슈퍼스타였고, 카이퍼는 2024년 현재를 사는 글램록커 지망생이다. 카이퍼는 블루닷을 통해 글램록을 배웠다. 그가 얘기하는 “매혹적인 록, 음악적으로는 로큰롤부터 아트록까지 다양한 양식을 두루 포함하고 거기다 원색의 가발, 화려한 의상, 반짝이는 화장까지 시각적 이미지로 완성되는 음악”이라는 글램록 개념은 블루닷을 통해 완성된 것이다.
뮤지컬 &lt;이터니티&gt;의 '블루닷' 역을 맡은 김준영 / 사진제공. © (주)알앤디웍스
외로움을 이해하다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블루닷과 카이퍼는 ‘우주적 상상력’ 안에서 문학적으로 확장된다. 공연은 1977년에 발사된 보이저 1호 이야기와 칼 세이먼의 저서 <창백한 푸른 점> 안에 세계관을 놓는다. 블루닷은 보이저 1호가 1990년 60억km 우주에서 찍은 ‘지구’를 칼 세이먼이 ‘창백한 푸른 점’이라 명명한 것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카이퍼는 해왕성 궤도보다 더 바깥에 있는 ‘카이퍼 벨트’에 존재하는 이름 없는 ‘소행성’이다.

두 인물의 서사는 이름의 의미망 안에 있다. 공연 초반 카이퍼는 무중력 우주의 한 점에 존재하는 듯 무료해 보인다. 그 무료함은 태양계 외곽에 홀로 떠 있는 어떤 존재의 근원적 외로움을 담는다. 블루닷 음악의 뿌리도 역시 외로움이다. 블루닷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해 집을 나와 ‘혼자’ 떠돌며 노래했던 과거를 갖고 있었다. 글램록을 향한 예술적 영감은 부모가 가했던 학대의 이유였고 그로부터 배태된 ‘외로움’이 블루닷 음악의 정체성이 되었다.
뮤지컬 &lt;이터니티&gt;의 '블루닷' 역을 맡은 현석준 / 사진제공. © (주)알앤디웍스
카이퍼는 절대적 고독 속에서 블루닷이 음악 안에 뿌려 놓은 이 메시지를 읽는다. 글램록커가 되고 싶었던 카이퍼에게 블루닷은 단순한 슈퍼스타가 아니라, 외로움을 견디게 만든 ‘유일한 존재’였다. 따라서 그의 눈에 들어오는 블루닷은 ‘창백한’ 푸른 점을 넘어선 존재로 확장된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스타일로폰은 이를 상징한다.
뮤지컬 &lt;이터니티&gt;의 '카이퍼' 역을 맡은 조민호 / 사진제공. © (주)알앤디웍스
두 행성이 완성하는 하나의 우주

카이퍼가 이해하는 블루닷의 외로움은 그뿐만이 아니다. 블루닷의 외로움은 자신의 음악이 점차 이해받지 못해 퇴물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더욱 심화한다. 그의 글램록은 우주 탐사선을 발사하던 시대적 흥분에서 배제됨으로써 음악적 생명력을 잃는다. 블루닷은 탐사선 안에 들어갈 골든 레코드 수록곡 라인업 경쟁에서 클래식 곡과 후배 JJ에게 계속 밀려나며 ‘버려진 명왕성처럼’ 퇴출당한다.

하지만 카이퍼는 오히려 이런 블루닷을 온전히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찾아온 ‘마그네틱 하이웨이’ 페스티벌에 서기 위해 아무도 듣지 않는 블루닷의 글램록에서 영감을 받아 음악을 작곡한다. 과거 블루닷 역시 탐사선 수록곡에 들어갈 음악을 ‘마그네틱 하이웨이’에서 발표하겠다고 마지막 발악처럼 공표한 바 있었다.
뮤지컬 &lt;이터니티&gt; 공연 / 사진제공. © (주)알앤디웍스
둘의 음악은 과거에도 인정받지 못했고 현재엔 더더욱 올드하지만, 하나의 점 ‘이터니티(Eternity)’에서 만난다. 블루닷의 음악은 우주로 발사되지도, 지구에서 살아남지도 않았지만, 카이퍼로 인해 영원한 생명력을 얻는다. 그 공간이 태양계의 외곽지역 ‘마그네틱 하이웨이’라는 아이러니한 의미를 품고 있지만 말이다.

뮤지컬 <이터니티>는 이처럼 블루닷과 카이퍼라는 인물이 두 개의 행성이 되어 하나의 우주를 만드는 과정을 담는다. 이들은 각각 별개의 궤도를 그리며 이해받기 어려운 마이너리티에 속해 있지만 서로의 존재로 인해 ‘음악’ 안에서 일체감을 느낀다. 그 일체감은 ‘너와 나’ 사이에서 매우 좁고 깊게 형성되지만, 그 자체로 세계가 완성되는 감각이다.

<홍련>이 씻김굿으로 완성했다면, <이터니티>는 글램록으로 완성한 바로 그것. 2024년 한국 뮤지컬은 이렇게 유독 배제된 자, 약자들을 향한 치유와 위로의 감각을 담는다.
뮤지컬 &lt;이터니티&gt; 공연 / 사진제공. © (주)알앤디웍스
[ 뮤지컬 '이터니티' 캐릭터 영상]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