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나홍진 거쳐간 서울독립영화제…50돌 축포 ‘백현진쑈’가 쏜다

서울독립영화제, 11월28일부터 9일 간 개최
1975년 한국청소년영화제로 출발한 국내 대표 독립영화제

출품작만 역대 최다 1704편…이 중 133편 상영
개막작은 실험성 돋보이는 ‘백현진쑈 문명의 끝’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인 '백현진쑈 문명의 끝' 스틸. /서울독립영화제
“솔직히 영화를 만들면서 ‘이게 영화야?’란 생각했거든요. 백현진 작가가 ‘우기면 영화지’라고 말해서 한 번 우겨봤어요. 기존 영화 문법엔 안 맞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재밌게 나온 것 같아요.” (박경근 영화 ‘백현진쑈 문명의 끝’ 감독)

“말로 모든 걸 표현할 수 없으니까 보이고 들리는 작업을 만들어내는 거죠. 이 영화를 언어 몇 줄로는 설명할 수 없고, 직접 봐야 호기심을 해소할 수 있을 거예요.” (백현진 영화 ‘백현진쑈 문명의 끝’ 프로듀서 겸 배우)독립영화는 흔히 ‘블록버스터’로 대표되는 상업영화에선 다룰 수 없는 자유로움과 예술적인 면모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넉넉하진 않아도 독립된 자본으로 ‘아트필름’을 만드는 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강렬한 질문을 던지는 게 독립영화의 역할이다. 미지의 감각을 탐구하는 걸 즐기고, 순간의 서정에 매료될 줄 아는 씨네필(Cinephile·영화 애호가)들이 돈과 시간을 들여 영화가 걸린 몇 안 되는 상영관을 찾아가는 이유다.
5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열린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공식 기자회견에서 김영우 프로그래머가 출품작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
지난 10월 부산 ‘영화의 바다’에 빠졌던 씨네필들이 11월 들어 서울을 주목한다. 오는 28일부터 한국 독립영화인들의 큰 잔치인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가 개최되기 때문. 국내 최고(最古) 경쟁 독립영화제로 50돌을 맞이한 올해는 무려 1704편의 출품작이 쏟아진 가운데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영화 ‘백현진쑈 문명의 끝’이 개막작으로 포문을 연다.

‘50돌’ 영화제, 위기 속 역대급 흥행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회는 5일 서울 사당동 아트나인 기자회견을 열고 개막작 등 주요 프로그램을 공개했다. 11월 28일부터 12월 6일까지 9일 동안 CGV영등포와 CGV압구정, CGV청담씨네시티 등 7개 관에서 열리는 영화제는 단편 92편, 장편 41편 등 올해 제작된 133편의 독립영화를 상영한다.

집행위에 따르면 올해는 전년 대비 330편(24.0%) 늘어난 1704편(단편 1505편·장편 199편)의 출품작이 접수됐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영화시장이 침체된 2020년 이후 4년간 평균 1482편에 불과했던 출품작이 대폭 늘어난 것이다. 특히 단편의 경우 전반적인 만듦새가 높아졌고, 장편은 실험영화와 극영화를 오가는 개성있는 장르 혼종 다큐멘터리가 두드러졌다. 서울독립영화제의 출품통계가 한국 독립영화 제·창작의 중요한 지표로 ‘한국영화연감’에도 매년 수록되는 만큼, 유의미한 성과라는 게 영화계의 평가다.

기존 영화 문법을 깨는 동시에 문화적 다양성이 커진 것이다. 다만 출품작의 증가는 상업영화 제작이 경색되며 유휴 인력이 독립영화에 참여하고, 영화관의 경영난이 스크린 독점 등 상업영화 양극화로 이어지며 영화적 다양성을 보장하는 영화제가 반대급부로 주목받은 영향도 컸단 분석이다. 김동현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영화산업이 위축된 터라 상업영화 창작자가 독립영화를 통해 본연의 작품활동을 이어가려는 의지가 강해 보인다”며 “특히 영화제를 찾는 관객이 유독 많아지고 있기도 하다”라고 설명했다.
5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열린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공식 기자회견에서 배우 권해효(왼쪽부터), 방은진 감독, 박경근 감독, 배우 백현진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연합
무엇보다 서울독립영화제가 다양한 실험을 추구하는 영화인들이 관객과 만나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에서 참여가 대폭 늘었다. 서울독립영화제는 1975년 한국청소년영화제로 출발해 금관단편영화제, 한국독립단편영화제 등을 거쳐 2001년부터 영화진흥위원회와 한국독립영화협회가 공동주최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경쟁독립영화제다. 강제규, 김성수, 임순례, 류승완, 봉준호, 나홍진, 연상호, 변영주 등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연 주역부터 역량있는 신진영화인들이 발굴됐다.

실험정신 쏟아부은 개막작…배우 프로젝트도 눈길

영화제는 독립영화 창작의 산실로 반세기를 이어온 만큼, 올해 개막작 역시 도전적이다. 집행위에 따르면 개막작은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인 박경근 감독인 연출한 ‘백현진쑈 문명의 끝’이다. 1세대 인디뮤지션 어어부 프로젝트 멤버로 설치 미술가, 연출가, 음향 엔지니어뿐 아니라 배우로도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약 중인 백현진이 제작에 참여했다.지난해 세종문화회관 프로그램 ‘싱크 넥스트 23’에서 선보인 실험극 ‘백현진쑈:공개방송’ 기록영상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로, 가수 장기하, 배우 김고은, 한예리, 김선영, 문상훈 등이 참여했다. 김영우 서울독립영화제 프로그래머는 “50번째 영화제를 맞이하며 그간 추구해온 도전정신과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정신과 맞아떨어지는 영화를 개막작으로 고르면 좋겠단 욕심이 컸다”면서 “백현진이라는 예술가의 내면을 확장하는 가운데 박경근의 시선이 어우러져 있다”고 소개했다.
서울독립영화제 2024 장편 경쟁작인 영화 '비트메이커' 스틸. /서울독립영화제
2018년 시작해 올해로 7회째인 ‘배우 프로젝트’도 눈에 띈다. 영화계 새 얼굴을 발굴하고 창작자와 연결하는 프로그램으로 배우 홍경, 노재원, 윤가이 등 실력파 배우들이 발굴된 프로그램인데, 올해는 역대 최다인 4856명이 지원해 202대 1의 경쟁을 뚫고 24명이 본선에 진출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배우 권해효는 “배우를 꿈꾸고, 배우로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잔치가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했다. 초기 필름영화를 디지털로 복원하는 ‘독립영화 아카이브전’ 섹션은 거장 유현목 감독이 1966년 제작한 35mm ‘손’, 하길종 감독의 UCLA(캘리포니아주립대) 졸업작인 ‘병사의 제전’(1969) 등을 선보인다.

‘예산 삭감’ 위기 속 계획은

다만 올해 서울독립영화제의 분위기가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문화체육관광부 내년도 예산 편성안에서 영화제를 공동 개최하는 영화진흥위원회가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키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올해 2억9600만원인 영화제 예산이 내년에 0원이 될 경우 영화제 존립을 장담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온다.이에 대해 김동현 집행위원장은 “서울독립영화제가 50년을 이어온 공로의 절반은 공동주최로 참여한 정부의 의지와 노력에 있다”며 “고난이 없으면 독립영화가 아니라지만 예산과 관련해 영진위와 방향을 지속 논의해갈 것”이라고 했다.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은 “아직 (예산이) 확정된 건 아닌 만큼 원상복구 하도록 최선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독립영화제 포스터. /서울독립영화제 제공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