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같은 유자왕과 얼음같은 비킹구르의 케미, 런던에서 대폭발

[클래식 리뷰]
런던 사우스뱅크 센터 로얄 페스티벌 홀
지난 1일 열린 '투 피아노(Two Pianos)' 공연 리뷰
비킹구르 올라프손과 유자왕의 협연

고전부터 현대를 아우른 공연 레퍼토리
스타일이 전혀 다른 두 음악가의 화학반응
클래식 음악은 수백 년 전 탄생한 선율이 악보에만 박제되지 않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2024년에도 원전은 새롭게 재해석되고 재창조된다. 동시대의 위대한 음악가들은 단순히 복제를 뛰어넘어서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데 일생을 쏟아붓는다.

자신만의 색깔이 분명한 젊은 피아니스트들을 꼽자면 이 두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유자 왕(37)과 비킹구르 올라프손(40). 클래식은 올드하다는 인식을 가볍게 빗겨 가는 두 아티스트다. 중국 베이징 출신의 유자 왕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교로 20대에 빠르게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 협주곡 등 화려하고 에너지 넘치는 곡에서 찰떡같은 호흡을 보여준다. 연주 실력뿐만 아니라 숏컷 헤어, 몸에 딱 붙는 초미니 드레스, 높은 힐로 완성되는 파격적인 스타일의 클래식 연주자로 유명하다.아이슬란드 출신의 올라프손은 반짝이는 기획력과 바흐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으로 빠르게 클래식계 슈퍼스타로 떠올랐다. 그가 내놓은 여러 장의 앨범은 ‘힙하면서 트렌디한 현대 클래식을 보여준다’는 평을 듣는다.* 화려한 기교나 속주보다는 그만의 감성과 독특한 해석에 방점을 찍는다. 180cm를 훌쩍 넘는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 웜톤의 댄디한 슈트를 즐겨 입고, 높은 도수의 뿔테 안경을 쓴다.
개성있는 피아니스트, 유자 왕과 비킹구르 올라프손.
이렇게 결이 다른 두 피아니스트의 만남은 어떤 소리로 펼쳐질까. 두 사람의 만남은 그 자체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획이었다. 직접 가서 듣지 않으면 상상도 안 되는 조합은 곧바로 티켓 파워로 이어졌다. 런던 사우스뱅크 센터 로열 페스티벌 홀의 2700석 넘는 객석은 일찌감치 매진됐다. 이후 무대 위 근접 관람을 위한 객석이 추가됐고, 200만원이 넘는 VIP석도 모두 솔드아웃됐다. 두 슈퍼스타의 공연을 함께 볼 수 있는 기회로 티켓 가격이 평소보다 2~3배 비쌌던 것을 감안하면 기록적인 흥행이다. 지난 1일(현지시간) 열린 두 사람의 공연에 다녀왔다.
결이 다른 두 피아니스트가 한 무대서 만났다. 런던 사우스뱅크 센터 로열 페스티벌 홀의 2700석이 넘는 객석은 일찌감치 매진됐다. / 사진. ⓒ조민선
첫 등장부터 둘의 조합은 신선했다. 반짝이는 실버 미니드레스를 입은 유자 왕은 또각또각 힐 소리를 내면서 빠른 걸음으로 등장, 거침없이 상체를 숙여 인사했다. 카키색 슈트를 입은 올라프손은 느릿느릿 부드럽게 상체를 숙여 수줍은 듯 인사했다. 무대 중앙엔 스타인웨이 피아노 두 대가 마주 보고 배치되었고, 유자왕이 고음 파트, 올라프손이 저음 파트를 맡았다. 둘의 조합은 언뜻 잘 안 어울릴 것 같지만, 함께 첫 곡을 연주하는 순간 우려는 날아갔다. 두 슈퍼스타의 시너지는 폭발적이었다.첫 곡은 루치아노 베리오의 <Wasserklavier(Water piano)>로, 차분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로 시작했다. 곧바로 두 번째 곡인 슈베르트의 <Fantasia in F minor, D.940>으로 넘어가 두 사람은 절묘한 합을 보여줬다. 유자 왕이 올라프손의 드라마틱하고 섬세한 연주 스타일에 맞추는 듯하다가, 올라프손이 유자 왕의 파워풀한 타건에 맞춰 속도와 볼륨을 끌어올리며 호흡을 맞췄다. 두 피아니스트는 거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서로 소리를 듣고, 느끼고, 합쳐가며 18분간 로맨틱한 연주를 들려줬다.

공연 레퍼토리는 고전적이고 낭만적이면서도 현대적이었다. 슈베르트 곡 같은 전통의 클래식이 중심을 잡고 있지만, 곳곳에 루치아노 베리오, 존 아담스 등 현대 음악 레퍼토리를 결합한 기획력이 돋보였다.
유자 왕과 비킹구르 올라프손의 연주 장면 / 사진출처. 비킹구르 올라프손 인스타그램
슈베르트 이후 존 케이지(Cage)의 <Experiences No.1>에서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연주를 들려줬다. 콘론 냉커로우의 <Player Piano Study No. 6>에서는 두 사람의 에너지가 최대치로 폭발했다. 1부 마지막 곡인 존 아담스의 <Hallelujah Junction>는 숨 쉴 틈 없는 빠른 전개에 밝고 경쾌한 분위기가 압도적인 곡. 현대 음악에 재즈풍이 묻어나는 연주였다. 유자 왕의 손가락은 믿을 수 없는 스피드로 몰아쳤고 올라프손의 저음은 묵직하고 강렬하게 내리쳤다. 두 사람은 스릴 넘치게 속도와 강약, 박자를 가지고 놀다 격렬한 피날레를 선보였다.전형적인 레퍼토리에서 멀리 벗어난 만큼, 사운드의 결도 매우 다채로웠다. 공간을 푸른 빛으로 채웠다가, 갈색으로 물들게 하고, 갑자기 붉은색 열정의 공간으로 몰아치는 듯한 다차원적 접근이 관객들의 세계를 확장시켰다. 가까이서 본 올라프손은 마치 마법을 부리듯,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모았다 폈다 하며 건반을 주물렀다. 짧은 포즈(pause) 구간에는 한 손을 귀 뒤로 넘기거나, 턱을 괴거나, 양팔으로 두 팔을 감싸는 등 다양한 제스처로 클래식 음악에 대한 편견을 깼다. 유자 왕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듯한 간결하고 명쾌한 타건과 속주로 그의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두 사람의 조합은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바라보던 객석의 분위기도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진출처. 비킹구르 올라프손 인스타그램
2부의 마지막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Symphonic Dances>로, 두 사람은 리듬을 갖고 노는 듯한 호흡으로 객석을 사로잡았다. 오케스트라 못지 않은 다이나믹과 리듬이 돋보이는 곡으로, 두 피아니스트의 역량이 최대치로 빛났다. 파워풀한 속주와 간간이 삽입되는 여백이 대비되면서 곡의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무려 6곡의 앵콜이 이어졌다. 앵콜 무대에선 두 사람이 나란히 한 피아노에 앉아 연주를 함께 했다. 둘의 뒷모습은 마치 사이좋은 친구처럼 다정해 보였고 객석엔 웃음이 번졌다. 커튼콜 후 올라프손과 유자왕은 서로에게 아티스트로 깊은 경의를 표했다.
앵콜곡을 연주하고 있는 유자 왕과 비킹구르 올라프손. 나란히 한 피아노에 앉아 연주했다. / 사진. ⓒ조민선
이 공연은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오스트리아 비엔나, 독일 베를린 등을 거쳐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캐나다 토론토, 미국 뉴욕으로 이어지는 두 사람의 유럽, 북미 투어의 일부다. 중국의 천재 피아니스트와 아이슬란드의 힙하고 트렌디한 피아니스트의 만남은 그 자체로 클래식 음악계에 새로운 에너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조성진,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젊은 관객들을 클래식 음악계로 끌어온 것처럼, 이번 공연같은 색다른 기획은 동시대 클래식 관객들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아주 영리한 전략이다.
사진. ⓒ조민선
런던=조민선 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