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저튼처럼 바스를, 갱스터처럼 버밍엄을 …영국 여행의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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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스튜디오가 된 영국
영화 드라마 주인공처럼 떠나본
버밍엄·바스·런던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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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전 겨울 개봉해 이제는 크리스마스 고전 영화가 된 ‘러브 액츄얼리’의 한 장면이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휴 그랜트 분)가 미국 대통령을 향해 던지는 대사다. 자신을 얕잡아보던 이를 향한 통쾌한 일격이자, 영국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문장. 윈스턴 처칠과 데이비드 베컴을 빼면 공통점이 있다. 문화 예술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것.가을을 부지런히 통과하고 있는 영국을 찾았다. 버밍엄, 바스,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 무심코 영화 대사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만약 지금 러브 액추얼리를 다시 만든다면 영국 총리의 대사에 들어갈 만한 명작들이 지금도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에서 흥행 기록을 다시 쓴 드라마 ‘브리저튼’부터 ‘2000년대의 대부’라는 극찬이 쏟아진 시리즈물 ‘피키 블라인더스’, 이름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된 ‘미션 임파서블’의 시작점,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이 된 ‘브리짓 존스’ 시리즈까지. 이들 모두 영국 구석구석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런던은 물론 기차로 1~2시간이면 로맨틱한 영국 중세 시대로, 산업혁명 시기 탐욕의 전쟁터로 떠날 수 있다.
이제 이 작품들이 만들어진 현장을 따라 여행하며 명장면 속으로 들어가볼 순간이다. “레디, 액션!”산업혁명과 갱들의 역사 속으로 ‘피키 블라인더스’의 버밍엄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정말 대단하네.’
영국 제2의 도시 버밍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도시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자부심이 이해가 간다. 인류 문명의 역사를 바꿨다고 평가받는 18세기 산업혁명의 무대가 바로 버밍엄이기 때문이다. 석탄, 석회암, 철광석 등 지하지원이 풍부한 덕분이었다. 버밍엄을 중심으로 인근 소도시인 더들리, 울버햄프턴까지 하나의 거대한 산업지구가 형성됐다. 공장은 멈출 줄 몰랐고, 전국 각지로 이어지는 철길에는 밤낮없이 기차가 오갔다. 오죽했으면 ‘블랙 컨트리’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산업혁명 당시 제철공장의 굴뚝에서 쉴 새 없이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광경이 검은 세계와도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19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도시는 점차 쇠락하는 듯 보였다. 산업 구조가 바뀌고, 젊은 노동자들이 떠나면서다. 그러나 2013년 뜻밖의 쇠퇴한 도시가 다시 화제의 중심에 오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넷플릭스 시리즈 ‘피키 블라인더스’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부터다.
‘지금 브리저튼 세트장 속에 들어온 건가?’
‘브리저튼’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바스 기차역에서 나오자마자 이런 생각을 할 것 같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만 드레스와 턱시도였다면 드라마 장면과 다를 바 없을 듯했다. 거리에 지어진 지 200년이 훌쩍 넘은 고풍스러운 건물이 줄지어 있는 덕이다. 교외에 있는 작고 아기자기한 바스는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였다. 2020년 넷플릭스를 통해 ‘브리저튼’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전 세계에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1800년대 초반의 리젠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시대극이다. 고풍스럽고 클래식한 분위기를 간직한 촬영지를 찾던 제작진의 눈에 띈 곳이 바로 바스였다.
‘브리저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묘미는 바로 음악이다. 아리아나 그란데, 빌리 아일리시, BTS까지 최신 팝을 실내악 오케스트라로 변주해 시대극에 어울리는 BGM으로 탄생시켰다. 투어 참가자들은 블루투스로 연결된 헤드폰을 통해 가이드 겸 DJ가 들려주는 OST를 감상하며 도시를 돌아본다.
브리저튼 신드롬을 탄생시킨 시즌1 주인공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길은 무척 흥미롭다. 다프네-사이먼 커플이 산책하며 말다툼하던 골목길, 다정하게 데이트를 즐기던 공간, 무도회가 열리는 레이디 댄버리의 저택, 페더링턴 가문의 저택 등 드라마 시청자라면 반가울 수밖에 없는 장소들이 이어진다.
‘바스 토박이’가 투어를 진행하는 덕분에 촬영 비하인드도 들을 수 있다. 브리저튼 촬영 현장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건물 하나를 가릴 정도의 거대한 천을 동원했고, 촬영팀 역시 바스 지역사회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기부금을 냈다는 것.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투어가 끝나면 바스 거리가 드라마에서처럼 낭만적인 공기로 차오른다.
‘미션 임파서블’ ‘브리짓 존스’ 시리즈의 탄생지, 런던
볼 것도, 즐길 것도 많아 어디서부터 여행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영화 촬영지를 따라가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유서 깊은 두 편의 프랜차이즈 영화 ‘미션 임파서블’과 ‘브리짓 존스’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촬영됐기 때문이다. 고전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두 시리즈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런던 한 바퀴’ 완성이다.
그 시작은 기차역부터다. 영화 해리포터 속 ‘9와 3/4 승강장’으로 유명한 킹스크로스역이 있다면, ‘미션 임파서블’에는 리버풀스트리트역이 있다. 1996년 첫 편을 시작으로 20여 년을 이어온 시리즈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다. 전 세계를 무대로 아찔한 스턴트를 선보이는 에단 헌트(톰 크루즈 분)의 고생담이 시작된 곳이라는 의미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공중전화에서 지령을 받는 장면, 미션을 수행하다 죽은 줄 알았던 동료 짐 펠프스를 마주치는 장면이 모두 리버풀스트리트역에서 촬영됐다. 세월이 지나면서 역의 간판은 화려해졌고 공중전화 부스는 현금인출기로 바뀌었지만 작품의 팬이라면 영화 속 그 장소를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버밍엄·바스·런던=김은아 한경매거진 여행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