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공감…'주주충실의무' 말바꾼 사법부

'상법 개정안' 입장 선회, 왜

"법 체계 안맞고 소송남발 우려"
21대선 '신중 검토' 주장했지만
22대엔 "취지 공감" 입장 뒤집어

법원행정처 "관련 법안 증가 등
21대와 상황 달라진 점 고려"
일각 "법리보다 정치상황 의식"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와 총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에 대해 21대 국회에서는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던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최근 “입법 취지에 공감한다”는 의견을 국회에 제출해 사법부 판단에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나온다. 법리적 판단을 최우선시해야 하는 사법부가 정치 지형 변화를 의식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법원행정처는 이에 대해 “22대 국회에는 관련 법안 자체가 많아졌고 세간의 관심이 높아지는 등 상황이 바뀌어 입장도 달라진 것”이라고 해명했다. 상법 전문가들 사이에선 “상황이 달라졌다고 기존 의견과 다른 의견을 내놓는 것은 사법부가 정치적 독립성을 포기했다고 스스로 인정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경영계 우려 인정하더니…

10일 정치권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월 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을 당시 “충실의무 대상에 총주주를 추가하는 건 대법원 판례를 통해 오랜 기간 인정돼 온 법인격 독립론에 반한다”며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대법원은 일관되게 ‘주주와 회사는 서로 다른 법인격을 가진 주체이고, 이사는 위임계약 상대방인 회사에 충실의무를 질 뿐 주주에 대해선 선관주의의무나 충실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취지의 판시를 해왔다”는 설명이었다.

법원행정처는 또 ‘회사’와 ‘총주주’를 나란히 충실의무 대상으로 열거할 경우 이사로서는 회사와 총주주를 모두 만족시키기 불가능해 교착 상태에 빠질 우려가 있다고 했다. “단기 실적을 원하는 소수주주의 이익에 반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회사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의사 결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사가 직접 주주에 대해 충실의무를 질 경우 소송 남발을 막기 위해 1% 이상 주주만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상법 규정이 무력화할 우려가 있다고도 했다. 기존 상법 체계와의 정합성이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상법개정안이 통과되면 이사회 활동이 위축돼 정상적인 경영이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경영계의 우려를 대부분 인정한 셈이다.

완전히 달라진 사법부 의견

하지만 22대 국회 들어 입장이 180도 바뀌었다. 같은 내용으로 발의된 박 의원 상법개정안에 대해 지난달 말 “이사에게 주주에 대한 보호의무를 부과하려는 입법 취지에 공감하며 기본적으로 입법정책적 결정 사항”이라는 의견서를 낸 것. 그러면서 “최근 회사의 분할·합병 과정에서 주주 간 부의 이전이 발생해 지배주주가 이익을 보고 소수주주가 피해를 보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고,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며 “개정안은 이런 이해상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부연했다.

법원행정처는 “해외 주요 국가도 이사에게 주주 이익을 보호할 의무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이사가 직접 주주에 대해 ‘신의성실의무’를 부담한다고 인정해 주주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가 가능하며, 영국 독일 일본도 주주의 이익이 침해될 경우 직접적인 구제 수단을 인정한다”는 설명이다.

다만 법원행정처는 주주 이익 보호의무는 ‘주의의무’와 ‘충실의무’ 성격을 모두 가지기 때문에 충실의무에만 한정하지 말고 주의의무를 함께 명시하라고 권고했다.이 같은 입장 변화에 대해 법원행정처는 “21대와 22대 상황이 달라진 만큼 사법부 입장도 바뀌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관련 법안 수 자체가 많아졌고, 정치권뿐만 아니라 상법학계에서도 학술대회를 여는 등 세간의 관심이 높아진 점을 고려했다”며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건 아니다”고 했다. 하지만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법원행정처가 과거에 제시한 논리가 정확했다”며 “이렇게 입장을 바꾼 것이 사법부 스스로 독립적 판단을 포기한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한재영/민경진 기자 jy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