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군가를 틀어놓고 무대를 점령해버린 '성조기 파드되'

[발레 리뷰] 서울에서 만난 뉴욕의 열정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9~10일 공연한 '더 나잇 오브 뉴욕'
ABT 무용수들이 꾸민 발레 갈라
갈라는 명작의 일부들을 발췌해 꾸민 무대다. 종합 선물세트 같아서 장단점이 명확하다. 누구나 즐길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이지만 대단원을 향해 가는 긴장감을 맛보기가 어렵다. 발레 갈라도 그렇다. 미국 아메리카발레시어터(ABT)가 내한 갈라 공연을 선보이겠다고 했을 때 유명 고전 발레의 하이라이트를 짜깁기해서 색다른 모습을 제시해 줄 수 있겠느냐가 최대 관심사였던 이유다.

이프로덕션이 지난 2022년에 이어 세번째로 기획한 갈라 공연 <더 나잇 인 뉴욕>이 지난 9~10일 서울 광진구 능동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펼쳐졌다. 초청된 ABT 무용수들은 ‘확실한 한 방’을 선사해줬다. <더 나잇 인 뉴욕>이라는 제목을 달고 무대에 등장한 무용수들은 자유로움과 열정으로 무대를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발레리노들은 단단한 코어 근육을 자랑하며 용수철처럼 뛰어올랐고, 중심 축이 흔들리지 않게 착지했다. 격정적으로 춤을 추다가 어느 한순간 정지화면처럼 온 몸의 근육을 조여 멈추는 안무 구성도 신선했다. 하늘하늘, 흐르는 물처럼 움직임을 이어가는 유럽식 발레에 익숙했던 발레 팬들에겐 새로운 볼거리를 안겨준건 확실해보였다.
'성조기 파드되'를 선보이는 엘리자베스 베이어(왼쪽)와 제이크 록샌더 / 사진. ⓒ김윤식
백미는 1부의 마지막인 <성조기 파드되>였다. 안무가인 조지 발란신은 1958년 만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어떤 스토리는 없고, 그저 USA'라고 짤막하게 답했다고 전해진다. 높은 저작권료 때문에 이 파드되를 국내에서 접하기에도 쉽지 않다. 서양인치고는 작은 두 남녀 무용수가 미국 군가에 맞춰 등장했는데 놀라울 정도의 무대 장악력을 보였다.

발레리노 제이크 록샌더는 갈라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개척자 정신을 담고있는 뉴욕이란 도시를 발레로 전달하는데 사력을 다했다. 윙크와 깜찍한 경례와 같은 무대 매너와 함께 힘찬 도약과 손발끝까지 터져나가는 에너지를 모두 보여줬다. 마치 발에 스프링이 달린듯한 모양새로 군가의 박자를 가지고 노는듯 했다. 파트너였던 발레리나 엘리자베스 베이어 역시 단신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고 유연한 팔다리 동작과 현란한 스텝에 무대가 꽉 차게 느껴졌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무대였지만 두 무용수가 즐기고 있는 모습을 통해 미국 발레의 자유로운 표현과 스타일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백조의 호수 가운데 '흑조 파드되'를 보여주고 있는 ABT 수석무용수 클로이 미셸딘·토마스 포스터 / 사진. ⓒ김윤식
즐겁고 신나는 무대 중간중간 고전 발레의 하이라이트가 채워졌다. 수석무용수 클로이 미셸딘이 보여준 백조의 호수 '흑조 파드되', 최근 무용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코치로 나서며 이름을 알리고 있는 발레리노 한성우의 지젤 속 파드되는 고전미를 챙기면서도 아메리카발레시어터만의 스타일을 입혔다.미셸딘의 상체 동작과 흔들림 없는 균형 감각은 유럽 발레의 튀튀(발레 무용수의 치마)보다 반지름이 짧은 치마였기에 더욱 현대적이고 세련돼 보였다. 한성우는 서양 무용수들에게 뒤지지 않는 피지컬과 절제된 감정 표현으로 관객의 박수를 받았다.

'더 나잇 오브 뉴욕'은 고전 발레 기법과 컨템퍼러리 서사가 결합해 화려한 볼거리와 깊이를 챙긴 영리한 갈라 공연이었다.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