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흩어진 한국 발레의 별들, 1월에 서울서 모여요"

[인터뷰] 한예종 무용원 김선희 교수
제자들 모아 내년 초 발레 갈라 공연
마린스키발레단 입단을 압둔 전민철(한예종3년)과 김선희 교수 / 제공. 김선희
현대발레의 거장 조지 발란신과 윌리엄 포사이스의 안무작은, 저작권료도 비싸지만 무용수들의 기량이 철저히 뒷받침돼야 한다. 한마디로 돈만 낸다고 무대에 올릴 수 없단 것.

그런데 어느샌가부터 한국인 무용수들이 이 까다로운 거장들의 작품을 공연하고 국제적 성과를 올리는 일들이 생겨났다. 윌리엄 포사이스는 보스턴발레단 상임 무용가였던 시절 한국인무용수 채지영, 이선우, 이상민을 위해 트리오 작품(부저드&캐스트렐)을 만들어줬다. 파리오페라발레단 박세은은 조지 발란신의 '주얼스'로 브누아 드 라 당스 상을 탔다. 박세은, 채지영 등 미국과 유럽의 유수 발레단의 주역급 무용수로 뛰고 있는 한국인 무용수 대부분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쳤다.
박세은 파리오페라발레 에투알 / 사진. ⓒ손자일
마린스키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민, 네덜란드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최영규, 파리오페라발레단 에투알 박세은, 보스턴발레단 수석무용수 채지영, 영국 로열발레단 솔리스트 전준혁,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솔리스트 박선미, 폴란드국립발레단 퍼스트솔리스트 정재은, 올해 파리오페라발레단에 1등으로 입단한 이예은, 내년 초 마린스키발레단에 솔리스트로 입단할 전민철까지 최고의 무용수들에겐 한예종 무용원 김선희 교수(65)의 지도가 있었다.
박선미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솔리스트 / 사진. ⓒ김윤식
러시아 마린스키발레의 바가노바 발레학교에서 지도자 과정을 마친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실기과 교수, 무용원장 등을 역임했다. 1996년 무용원 창립과 함께 한예종에 몸담은 이래 30년이 흘러 내년이면 정년퇴임이다. 그는 최고의 기량을 펼치고 있는 제자들을 한데 모아 내년 1월 서울에서 성대한 발레 잔치를 열기로 했다. 그를 지난 11일 서울 서초동 한예종 연구실에서 만났다.
김선희 교수 / 제공. 김선희
김 교수는 "피겨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따고, 노벨문학상을 타는 문화 강국이 된 현재, 한국 발레도 세계 최고 수준이 됐다"며 "훌륭한 제자들과 함께 한국에 계신 분들께 우리 발레의 세계적인 실력을 알리고 싶어 이번 공연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지난 30년간 발레는 다른 예술 분야보다 압축적으로 성장했고, 아웃풋을 내왔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무용수들의 춤을 보시면서 한국 문화예술의 저력을 되새기고 발레라는 예술에 대한 다양한 지원책을 생각할 수 있는 자리가 되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마린스키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민과 김선희 교수 / 제공. 김선희
김 교수는 제자들이 속한 발레단 예술감독들에게 지난 여름 서신을 띄웠다. 당신들이 서양의 전통 문화인 발레를 수백년동안 계승해왔기에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이 성장할 수 있었다는 감사 인사를 첫머리에 썼다. 그리고 당신의 발레단에서 활동하는 무용수를 잠시 초청해 한국 관객에게 소개할 기회를 갖고 싶다는 마음을 꾹꾹 눌러담아 정중히 전했다고. 보통 8월 말부터 다음해 6월까지 이뤄지는 공연 시즌을 감안하면 1월은 시즌의 한 가운데다.

"연말 공연이 지나 한 숨 돌리며 다음 작품을 준비할 타이밍에, 대부분의 제자들이 '단장님이 허락했어요, 갈게요'라고 하니 감동이었죠. 정말 많이 혼내고 눈물 쏙 빼가며 가르친 자식과도 같은 아이들이거든요."

내년 1월 <발레의 별빛>이란 이름으로 열리는 이번 공연에는 한예종 출신으로 국내를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활약하는 40여명의 무용수가 갈라 무대를 꾸민다. 공연은 클래식, 네오클래식(토슈즈를 신는 현대발레), 컨템퍼러리, 창작물 등 20개의 레퍼토리로 짜여졌다. '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정교하게 정리해 조화를 이루는 것'이 김선희 교수의 발레 지론인만큼 테크닉과 표현력이 동시에 요구되는 작품들로 구성돼 있다.
최영규와 박선미는 한예종 후배들과 조지 발란신의 '테마 & 바리에이션'을 올린다. 박세은은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인 김기완과 함께 발란신의 '주얼스' 가운데 '다이아몬드'를 보여준다. 이밖에 한예종 무용원 조주현 교수가 2022년부터 꾸준히 선보여온 '수제천',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강미선이 지난해 '브누아 드 라 당스'상을 타게 된 창작발레 '미리내길'도 무대에서 만날 수 있다. 발레팬들의 기대감은 폭발적이다. 11일 티켓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1층 전석과 2층의 R석까지 거의 팔려나갔다.

"외국에 유학하지 않고도 세계적 수준의 인재 양성이 무용원 설립 당시 첫째 목표였는데요, 이렇게 빠르게 이뤄질지는 생각 못했어요. 저의 퇴임은 다가왔지만 한국 발레에 대한 욕심은 여전해요. 그래서 후배 지도자들에게 50년, 100년을 내다보고 '유기농 같은' 우리 아이들 더 잘 키워보라고 얘기하곤 합니다."
'라 바야데르'에서 공연중인 김기민과 박세은
김 교수는 이번 공연과 은퇴를 계기로 학교 바깥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을 계획하고 있다. 유명 발레단장, 예술감독 등 발레계의 영향력있는 인사들을 모아 '서울발레포럼'을 열겠다는 것. 이르면 내년 10월 첫 총회를 연다. 발레 워크숍, 발레계 현안을 논의하는 장을 마련한다는게 그의 오랜 꿈이다. 김 교수는 "그 전에 이들을 1월 공연에 초청해 긍정적인 충격을 주고 싶다"며 "당신의 발레단 소속 무용수 외에도 뛰어난 한국 무용수들이 이만큼이나 많다는 사실을 알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공연에 관객으로 오겠다고 전한 이들은 전민철을 발탁한 마린스키발레단의 유리 파테예프 전 감독, 테드 브랜드슨 네덜란드국립발레단 예술감독, 미코 니시넨 보스턴발레단 예술감독, 권위있는 무용잡지 포인트매거진 수석 에디터 에이미 브랜튼 등이다. 공연 <발레의 별빛>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1월 11~12일 열린다.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