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아버지’가 된 하이쿠 시인 [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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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내게
머무는 그대에게
두 개의 가을.
-마사오카 시키-----------------------서른다섯에 짧은 생을 마감한 일본 ‘근대 하이쿠의 아버지’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1867~1902). 이전까지 하이카이로 불리던 것을 ‘하이쿠’로 정립한 그는 스물세 살 때부터 폐결핵으로 고생하면서도 35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2만여 편의 하이쿠를 남겼습니다.
그는 한창나이에 1주일간 각혈한 뒤 울며 피를 토한다는 두견새(子規·시키)를 필명으로 짓고 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29세부터는 병이 깊어져 병상에 누워 지내야 했습니다. 짧고 가혹한 생애를 견디게 해 준 힘은 시였습니다.그에게는 학창 시절부터 같이 지낸 글벗이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친한 벗이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였습니다. 동갑내기인 둘은 도쿄대학 시절 만났습니다. 시키의 문집 뒷부분에 소세키가 비평을 쓴 게 우정의 시작이었지요. 소세키는 이때 처음으로 ‘소세키’라는 필명을 썼는데, 이는 원래 시키의 여러 필명 중 하나였습니다. 시키가 자신의 필명을 그에게 줄 정도로 둘은 절친이었습니다.
둘은 같은 하숙방을 쓰거나 여행을 함께 다니며 삶과 문학을 논했습니다. 서로의 작품을 발표할 지면도 마련했지요. 시키는 자신이 창간한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두견새)>에 소세키의 출세작이자 일본 최초의 근대소설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실었습니다. 두 번째 작품인 《도련님》도 그 잡지에 실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하이쿠 ‘떠나는 내게/ 머무는 그대에게/ 두 개의 가을’은 시키가 고향으로 요양하러 갔을 때 그곳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소세키와 함께 지내다가 헤어질 때 아쉬움을 달래며 쓴 것입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떠나는 사람과 그곳에 머무는 사람 사이의 ‘두 가을’을 대비한 시였지요.이에 소세키는 ‘가을바람에/ 살아서 서로 보는/ 그대하고 나’라는 답시로 친구에게 희망을 북돋웠습니다. 또 ‘빌려주어서/ 내겐 우산이 없는/ 비 오는 봄날’이라는 시를 받고는 ‘봄비 내리네/ 몸을 바짝 붙이는/ 하나의 우산’이라고 화답했지요.
지난주에 ‘홍시여, 잊지 말라/ 너도 젊은 날엔/ 떫었다는 것을’이라는 소세키의 하이쿠를 소개해 드렸는데, 시키도 감에 관한 시를 많이 썼습니다. 그중에 ‘삼천수 되는/ 하이쿠 조사하고/ 감 두 개로세’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는 쉴 틈 없이 공부하는 중에 고작 감 두 개로 허기를 달래는 생활의 한 단면을 그린 것입니다.
또 다른 시 ‘감을 먹으면/ 종이 울리는구나/ 호류지’도 참 좋습니다. 나라(奈良)에 있는 유명한 고찰 호류지(法隆寺)에서 쓴 작품이지요. 그곳에는 감이 많습니다. 지천으로 널린 감과 고도(古都)의 정취를 종소리로 배합한 게 이 시의 묘미입니다. 절 앞 찻집에 들러 차와 감을 주문한 그가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종이 울렸다고 합니다. 감의 서민적인 이미지와 고찰의 명성을 청각적인 요소로 아우른 게 절묘하지요.다음 시는 그가 생의 끝부분에서 읊은 것입니다.
몇 번씩이나
내린 눈의 깊이를
물어보았네.
밖에는 폭설이 내리고, 방안은 적요하지요. 시인은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묻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젖은 시선으로 창밖을 보며 띄엄띄엄 답합니다. 시인이 자꾸 묻는 것은 몸을 움직이지 못할 만큼 병이 깊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둔 한겨울 고독이 서늘하지요. 눈 내리는 풍경을 볼 수 있도록 제자가 문을 유리로 바꿔 주었지만 그는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시의 적막이 금세 비애로 기울어질 듯하지만, 이것이 곧 고요 속의 달관으로 승화되는 과정이 놀랍습니다.
‘새해의 첫날/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다/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시도 이런 경지를 보여줍니다. 이 역시 병상에서 쓴 것입니다.
문인들은 그를 ‘근대 하이쿠의 아버지’로 부릅니다. 그런데 야구팬들은 그를 ‘일본 야구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야구가 미국에서 막 들어왔을 때 그는 하이쿠만큼이나 야구에 푹 빠졌지요. 야구 용어를 일본식 한자로 번역한 것도 그였습니다.
그는 병 때문에 대학을 중퇴한 뒤 일본신문에 기자로 입사해서 문예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때 일본신문을 통해 영어로 된 야구 용어를 한자어로 옮겼습니다. 야구(野球·baseball)라는 종목 이름부터 타자(打者·batter), 주자(走者·runner), 유격수(遊擊手⸱shortstop) 등의 용어가 모두 그의 작품이지요. 도쿄 ‘야구의 전당’에 그의 조각상이 유명 선수들과 나란히 걸려있는 게 이 덕분입니다.
도쿄 우에노 공원에 시키의 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시비에는 ‘봄바람에/ 공을 던지고 싶은/ 풀밭(春風やまりを投げたき草の原)’이라는 그의 하이쿠가 새겨져 있다. 젊은 날 공을 던지고 치던 초원의 한때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합니다.그는 한때 선수로도 활약하며 고향인 시코쿠 마쓰야마에 야구를 전파했습니다. 그 덕분에 시코쿠에서 일본 야구 선수들이 많이 나왔고 ‘야구의 고장’으로 유명해졌지요. 야구라는 용어 자체가 그의 또 다른 필명 ‘마사오카 노보루’의 ‘노(野)’와 ‘보루’(볼(ball)의 일본식 발음)를 묶어 만들었다는 얘기까지 있으니 과연 ‘일본 야구의 아버지’란 말을 들을 만하군요.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머무는 그대에게
두 개의 가을.
-마사오카 시키-----------------------서른다섯에 짧은 생을 마감한 일본 ‘근대 하이쿠의 아버지’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1867~1902). 이전까지 하이카이로 불리던 것을 ‘하이쿠’로 정립한 그는 스물세 살 때부터 폐결핵으로 고생하면서도 35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2만여 편의 하이쿠를 남겼습니다.
그는 한창나이에 1주일간 각혈한 뒤 울며 피를 토한다는 두견새(子規·시키)를 필명으로 짓고 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29세부터는 병이 깊어져 병상에 누워 지내야 했습니다. 짧고 가혹한 생애를 견디게 해 준 힘은 시였습니다.그에게는 학창 시절부터 같이 지낸 글벗이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친한 벗이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였습니다. 동갑내기인 둘은 도쿄대학 시절 만났습니다. 시키의 문집 뒷부분에 소세키가 비평을 쓴 게 우정의 시작이었지요. 소세키는 이때 처음으로 ‘소세키’라는 필명을 썼는데, 이는 원래 시키의 여러 필명 중 하나였습니다. 시키가 자신의 필명을 그에게 줄 정도로 둘은 절친이었습니다.
둘은 같은 하숙방을 쓰거나 여행을 함께 다니며 삶과 문학을 논했습니다. 서로의 작품을 발표할 지면도 마련했지요. 시키는 자신이 창간한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두견새)>에 소세키의 출세작이자 일본 최초의 근대소설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실었습니다. 두 번째 작품인 《도련님》도 그 잡지에 실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하이쿠 ‘떠나는 내게/ 머무는 그대에게/ 두 개의 가을’은 시키가 고향으로 요양하러 갔을 때 그곳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소세키와 함께 지내다가 헤어질 때 아쉬움을 달래며 쓴 것입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떠나는 사람과 그곳에 머무는 사람 사이의 ‘두 가을’을 대비한 시였지요.이에 소세키는 ‘가을바람에/ 살아서 서로 보는/ 그대하고 나’라는 답시로 친구에게 희망을 북돋웠습니다. 또 ‘빌려주어서/ 내겐 우산이 없는/ 비 오는 봄날’이라는 시를 받고는 ‘봄비 내리네/ 몸을 바짝 붙이는/ 하나의 우산’이라고 화답했지요.
지난주에 ‘홍시여, 잊지 말라/ 너도 젊은 날엔/ 떫었다는 것을’이라는 소세키의 하이쿠를 소개해 드렸는데, 시키도 감에 관한 시를 많이 썼습니다. 그중에 ‘삼천수 되는/ 하이쿠 조사하고/ 감 두 개로세’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는 쉴 틈 없이 공부하는 중에 고작 감 두 개로 허기를 달래는 생활의 한 단면을 그린 것입니다.
또 다른 시 ‘감을 먹으면/ 종이 울리는구나/ 호류지’도 참 좋습니다. 나라(奈良)에 있는 유명한 고찰 호류지(法隆寺)에서 쓴 작품이지요. 그곳에는 감이 많습니다. 지천으로 널린 감과 고도(古都)의 정취를 종소리로 배합한 게 이 시의 묘미입니다. 절 앞 찻집에 들러 차와 감을 주문한 그가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종이 울렸다고 합니다. 감의 서민적인 이미지와 고찰의 명성을 청각적인 요소로 아우른 게 절묘하지요.다음 시는 그가 생의 끝부분에서 읊은 것입니다.
몇 번씩이나
내린 눈의 깊이를
물어보았네.
밖에는 폭설이 내리고, 방안은 적요하지요. 시인은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묻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젖은 시선으로 창밖을 보며 띄엄띄엄 답합니다. 시인이 자꾸 묻는 것은 몸을 움직이지 못할 만큼 병이 깊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둔 한겨울 고독이 서늘하지요. 눈 내리는 풍경을 볼 수 있도록 제자가 문을 유리로 바꿔 주었지만 그는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시의 적막이 금세 비애로 기울어질 듯하지만, 이것이 곧 고요 속의 달관으로 승화되는 과정이 놀랍습니다.
‘새해의 첫날/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다/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시도 이런 경지를 보여줍니다. 이 역시 병상에서 쓴 것입니다.
문인들은 그를 ‘근대 하이쿠의 아버지’로 부릅니다. 그런데 야구팬들은 그를 ‘일본 야구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야구가 미국에서 막 들어왔을 때 그는 하이쿠만큼이나 야구에 푹 빠졌지요. 야구 용어를 일본식 한자로 번역한 것도 그였습니다.
그는 병 때문에 대학을 중퇴한 뒤 일본신문에 기자로 입사해서 문예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때 일본신문을 통해 영어로 된 야구 용어를 한자어로 옮겼습니다. 야구(野球·baseball)라는 종목 이름부터 타자(打者·batter), 주자(走者·runner), 유격수(遊擊手⸱shortstop) 등의 용어가 모두 그의 작품이지요. 도쿄 ‘야구의 전당’에 그의 조각상이 유명 선수들과 나란히 걸려있는 게 이 덕분입니다.
도쿄 우에노 공원에 시키의 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시비에는 ‘봄바람에/ 공을 던지고 싶은/ 풀밭(春風やまりを投げたき草の原)’이라는 그의 하이쿠가 새겨져 있다. 젊은 날 공을 던지고 치던 초원의 한때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합니다.그는 한때 선수로도 활약하며 고향인 시코쿠 마쓰야마에 야구를 전파했습니다. 그 덕분에 시코쿠에서 일본 야구 선수들이 많이 나왔고 ‘야구의 고장’으로 유명해졌지요. 야구라는 용어 자체가 그의 또 다른 필명 ‘마사오카 노보루’의 ‘노(野)’와 ‘보루’(볼(ball)의 일본식 발음)를 묶어 만들었다는 얘기까지 있으니 과연 ‘일본 야구의 아버지’란 말을 들을 만하군요.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