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즘보다 무서운 트럼프…美 70조 투자한 전기차·K배터리 '비상'

"美 전기차 보조금 폐지"
또다른 생존게임 내몰려

배터리 후발주자 따돌릴 기회로
LG·삼성·SK, 중장기 플랜 수정
사진= AFP
“당분간 동면 모드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에서 전기차 세액공제 및 첨단제조 세액공제(AMPC)가 폐지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15일 국내 대형 배터리 제조사 전략 담당 임원은 “피해를 최소화하고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쇼크’가 한국 주력 수출 업종인 자동차와 배터리 산업을 흔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정권 인수팀과 정부효율위원회 수장에 임명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가 전기차와 관련된 규칙을 송두리째 바꾸면서다. 미국에 70조원가량을 투자한 K기업들은 당장 생존 해법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전기차 게임의 룰’ 바뀌나

완성차 및 배터리 업체들은 ‘트럼프 2.0’ 시대에 기존 룰이 바뀔 것이라는 데 이견을 달지 않는다. 다만 보조금을 전액 폐지하는 등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으로 예상해왔다. 한 배터리업체 대표는 최근 “대부분 배터리 공장이 공화당이 지역구로 있는 지역에 밀집해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당선인과 공화당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 지역의 경제를 침체시키는 행위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많다.

하지만 조 바이든 정부 때와 같은 전폭적인 지지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트럼프 2기 정부의 의도는 제너럴모터스(GM), 포드 등 자국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 전환에 따른 과도한 비용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GM 등 전통 완성차 업체는 테슬라에 전기차 분야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지만, 수익성 높은 내연기관 차량 판매를 통해 체력을 비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북미 시장 개척에 사활을 걸고 있는 현대자동차·기아가 위기와 함께 기회 요인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최대 7500달러(약 1000만원)에 달하는 세액공제가 실질적으로 절반 이상 줄어들 경우 K전기차의 미국 판매 감소는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차·기아는 올 3분기 누적 기준으로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테슬라에 이어 시장 점유율 2위 사업자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기아는 하이브리드 및 주행거리연장형전기차(EREV) 등 내연기관차와 순수 전기차를 잇는 브리지 기술을 다양하게 보유한 기업”이라며 “중국 차량에 대한 관세 장벽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현대차·기아도 원가 경쟁력을 바탕으로 북미 네트워크를 강화하면 오히려 전체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과거 1980~1990년대 도요타가 미국과 일본의 통상 갈등 상황에서 미국 현지 생산을 늘리고 판매망을 확대하는 등 밸류체인을 효율화해 오히려 점유율을 높인 것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야”

K배터리 업체들은 당분간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보조금 축소로 전기차 판매가 감소할 수밖에 없는 데다 제조에 주어지던 세액공제마저 줄어들 경우 수익성 악화가 불 보듯 뻔하다.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캐즘(대중화 전 일시적 수요 둔화)으로 가동률이 떨어지고 있는 터라 세액공제마저 줄어들면 일부 업체는 흑자 전환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배터리 전문가들은 글로벌 업체 간 ‘생존 게임’이 시작됐다고 입을 모은다. 유럽 최대 배터리셀 제조사로 출범한 스웨덴의 노스볼트도 미국발 한파에 큰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배터리사들도 자국 내 수요만으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많다.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중국 업체들이 유럽과 미국 시장에 접근하려면 인근 지역에 공장을 가동해야 하는데 아직 중국 배터리 제조사들은 외국인을 데리고 수율을 수익성을 낼 만큼 끌어올린 경험이 거의 없다”며 “K배터리 업체들이 에너지저장장치(ESS)용 배터리 등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잘 버티기만 한다면 ‘정해진 미래’로 불리는 전기차 시대에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성상훈 기자 up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