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갑부와 콜걸의 '7일간 미친 사랑'...부디 애니가 아노라로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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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만든2024년 제77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 ‘아노라’는 막상 국내 관객들에게는 그다지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고 그것은 어쩌면 현재의 한국 사회가 다소 보수화된 경향(정치와 종교적인 면에서) 탓일 수 있다. 한국에 오면 세계 유수의 영화들이 종종 빛을 잃을 때가 있다.
션 베이커 감독의
제77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할리우드 멜로영화의 공식 따르지 않아
'차이'로 시작해 '차이'로 끝나
'애니'에서 '아노라'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획득해야
현대사회에서 진실로 사랑할 수 있어
‘아노라’는 전반 1시간이 특히, 아주 많이, 야하다. 외설적이라는 일부 지적은 비교적 정당하다. 주인공 애니(그녀는 한사코 자신이 '아노라'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를 비롯해 극중 인물 여성들은 1시간 내내 조각 케이크 만한 T팬티만을 걸친 채 나온다. 이들은 이른바 랩 댄서라 불리는 스트립 걸들이다. 섹스 바의 플로어에서 스트립 봉춤을 추는 것은 물론 VIP룸에서 1인 남자 손님을 대상으로 몸을 밀착해 가며 근접 섹스 행위를 춤으로 보여 주는 서비스를 한다. 당연히 2차를 나가 매춘도 한다. 주인공인 애니(마이키 매디슨)는 러시아 황태자(엄청난 거부의 아들) 이반(마크 아이델슈테인)과 그렇게 만났고 둘은 전반부 1시간 내내 다양한 체위로 격렬한 섹스를 나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잠깐 의심한다. 이 영화, 섹스 영화야?아노라, 애니가 이반을 만나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다. 그녀는 그를 만나 마음껏 자신의 몸을 갖게 하고 돈이나 벌 심산이다. 애니는 액면가 그대로 그냥 창녀이다. 이반이 일주일 내내 섹스하는 값으로 만 달러(약 천5백만원)를 제안하자 그녀는 만5천달러로 하자고 한다. 그러자 이반은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며 너 정도면 3만을 불렀어도 준다고 했을 거야, 라고 말한다. 이 둘은 친구들을 만나 호텔 스위트룸을 돌아가며 술과 약, 섹스 파티를 즐긴다. 이들에게, 특히 이반 같은 돈 많은 젊은 애들에게는 미래 따위는 없다. 그저 여자를 데리고 실컷 노는 것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둘, 그러니까 이반과 애니가 충동적으로 라스베가스에서 결혼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때부터 다른 궤도를 달린다.
러시아에 있는 이반의 부모는 아르메니아 출신의 자기들 똘마니, 토로스(카렌 카라굴리안)와 가닉(바체 토브마시얀)에게 이들 결혼을 무효화 시키라고 지시한다. 둘은 이고르(유리 보리소프)라는 또 다른 러시아 건달을 데리고 일을 시작하지만, 이반은 줄행랑을 치고, 애니는 한 마디로 ‘생지랄’을 떤다. 이 과정에서 가닉의 코는 부러지고 이고르도 목을 물린다. 자신을 진정시키려는 남자들을 향해 애니는 이들이 자신을 강간한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까지 한다. 깡패 셋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될 만큼 ‘막돼먹은’ 여자에게 쩔쩔매며 이반을 찾아 나선다. 영화는 그렇게 후반부 1시간 동안 코미디 열차를 타기 시작한다.언뜻 보기에 영화 ‘아노라’는 로코(로맨틱 코미디)다. 만약 그런 ‘하찮은’ 장르라면 칸에도 어울리지 않고 무엇보다 황금종려상은 어불성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으로 칸은 이 영화에 열광했을까. 그건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멜로의 공식, 곧 디퍼런스(difference)를 완전히 뒤집고, 비틀어 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산 멜로영화는 원칙이 ‘차이’다. 남자는 돈이 많고 여자는 거리의 여자거나(‘프리티 우먼’), 남자는 중산층 계급의 남자지만 여자는 전철 역 토큰 판매원이다(‘당신이 잠든 사이에’). 그것도 아니면 남자는 공화당 대통령인데 여자는 진보적인 환경운동가다(‘대통령의 연인’). 할리우드 멜로 영화는 이렇게 처음에 남녀 간 큰 격차를 두게 하고 2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서서히 그것을 좁히게 만든다. 그래서 엔딩은 결국 둘이 그 차이를 없애고 사랑에 골인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남녀는 아무리 큰 차이가 나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거나 서로가 서로로 변화해서 완전한 사랑을 성공시킴으로써 모두를, 특히 관객들에게 행복을 준다.
이것은 일종의 마취제와 같은 것이다. 그런 사랑 이야기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혹 ‘신데렐라 신드롬’이 실현되는 경우도 있다. ‘왕자와 거지’ 이야기가 현실에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로또를 맞추는 사람이 있긴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대중에게 약간, 그것도 아주 약간 열어 준 틈새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남녀간 사랑이야기의 실제는 계급과 계층, 신분의 철창을 뛰어 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영화 ‘아노라’의 아노라가 결국 깨닫는 것은 자신의 처지가 결코 이 물신주의의 극치인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근데 그건 처음에 그녀 자신이 원한 것이기도 하다. 애니같은 여자는 벽장에 넣어 놓고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는 섹스 토이일 뿐이다. 자본주의에서 몸을 파는 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돈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상부구조가 만들어 놓은 관념은 돈이 없어도 도덕으로 지켜야 할 것이 육체적 순결이라는 것이다. 몸을 지키지 않는 여자 혹은 남자는 자본주의가 언제든 가차없이 버릴 수 있는 ‘물건’일 뿐이다. 이반은 부모의 자가용 비행기 트랩을 올라 가기 전에 애니, 아노라에게 말한다. “일주일 동안 고마웠어.”영화 ‘아노라’는 할리우드가 파놓은 ‘차이의 미학’이라는 허울좋은 덫에 빠지지 않는다. 처음의 차이를 끝까지 가져 간다. 이반과 아노라는 차이가 나는 커플로 만나 차이가 나는 커플로 끝이 난다. 애니는 자신과 같이 러시아계인 이고르와 잠깐 어떻게 해볼까도 생각하지만 그것도 만만치가 않다. 이고르는 애니가 자신의 러시아 본명인 아노라로 불리는 것을 왜 그토록 싫어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이 커플도 만약 연애를 시작한다면 또 다른 차이점을 갖고 시작하게 되는 셈이다.
결국 감독인 션 베이커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애니가 아노라로 되지 않는 이상 그녀의 창녀 ‘짓’, 그 계급과 신분의 허울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을 찾는 것, 자신의 계급계층적 아이덴티티를 자각하고 획득하는 것이야 말로 현대사회에서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진실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바로 그런 점을 알아 챈, 밝은 눈의 칸 영화제 심사위원들이 이 작품에 황금종려상을 수여한 것으로 보인다. 차이를 차이로 끝내는 멜로영화는 없다. 상업영화는 그러지 못한다. 영화 ‘아노라’는 그런 면에서, 아무리 전반부 1시간동안 벌거벗은 섹스 신이 즐비하게 나온다 한들, 상업영화나 포르노가 아니다. 이건 철저하게 비상업 독립영화이며 일정한 정치적 메타포를 지니고 있는 작가주의 예술영화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여주인공이 자신의 이름인 아노라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 근데 그것도 할리우드식 판타지일 수 있다.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그러지 못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속성이다. 그 ‘현실적인 인간주의’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노라’는 대단한 영화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굴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감독 션 베이커의 연출력에 찬사를 보내게 된다. 배급사인 유니버설이 ‘위키드’ 개봉에 ‘몰빵(?)’을 했다. 때문에 ‘아노라’ 배급은 손을 놓은 경향을 보인다. 눈밝은 관객들이라면 놓치기 아까운 작품이다. 괜한 추천을 하는 식으로 평론이 눈치 없이 끼어들 계제는 아닌 듯 싶다. 관객들 스스로 판단할 것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