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업 밸류업에 역행하는 이사의 충실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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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윤 연세대 명예교수최근 일부 대기업의 조직 재편 과정에서 나타난 소액주주 이익 침해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상법에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이미 선진국에서 입법화돼 있다는 주장과 함께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기업 밸류업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것이 주요 논거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잘못된 근거나 법리를 벗어난 판단으로 입법을 강행할 경우 그 부작용은 오롯이 시장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기업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선진국에 입법화돼 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원래 충실의무는 ‘신인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어서 이사가 개별 주주와 직접 거래나 별도 추가 계약을 하지 않은 한, 주주 일반에 대한 충실의무를 부정하는 것이 세계적으로 확립된 판례다.코리아 디스카운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도입돼야 한다는 주장은 문제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기업가치라 하더라도 단기적 가치와 장기적 가치가 다르며, 기업에 따라 주주마다 제고돼야 할 기업가치에 대한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단기 차익 실현에 관심이 많은 소액주주나 행동주의 펀드는 장기적 기업가치보다는 배당 확대나 자사주 소각 등을 선호하는 데 비해, 지속 가능한 경영을 중시하는 대주주는 미래 중장기 투자나 신기술 연구개발(R&D)에 필요한 자금조달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모든 주주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방안을 찾기 쉽지 않다.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서는 모든 주주의 재산적 이익이 동등하게 보호돼야 하고, 대주주가 사리사욕을 위해 소액주주의 이익을 희생하는 일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기업 의사 결정 과정에서 다수결 원칙의 내재적 한계로 모든 주주의 비례적 이익이 완전히 보장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 다수결 원칙을 부정하기보다는 그 공백을 합리적인 행위 요건이나 기준으로 메꾸거나, 위법행위자에게 결과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순리다.
하지만 이와 달리 이사에게 총주주 또는 주주의 비례적 이익에 대한 충실의무를 새롭게 지우려 한다면, 상반되거나 형량할 수 없는 기업가치 판단의 모든 책임을 이사에게 떠맡기는 결과가 된다. 이는 상반된 이해관계에 있는 주주들로부터의 소송이나 고발을 우려한 본능적인 방어기제 작동으로 모험적이거나 역동적인 투자를 기피하게 하고, 장기적으로 기업가치를 저하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올바른 입법을 위해서는 보다 다각적이고 면밀한 실체 분석과 함께 비례의 원칙이 잘 지켜져야 한다. 유례도 없고, 입법목적이나 내용이 모호한 투망식 입법으로 기업가치가 진정 제고될 수 있을지 넓고 긴 안목으로 되살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