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의 여걸' 클레오파트라 같았던 스모키 화장의 '사라 장'

[arte] 구본숙의 Behind the Scenes

2024 서울시향 해외 순회공연
아부다비 클래식스 2024 -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내 마음 한구석에 막연하게나마 사막에 대한 동경이 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사막 풍경을 담은 선배 작가들의 사진이 멋있어서였을 수도 있고 타고난 역마살 때문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그저 단순히 이국적인 풍경에 대한 환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멀게는 사막을 가로질러 오마 샤리프가 멋지게 말을 몰고 나타나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부터 가깝게는 티모시 샬라메의 <듄: 파트2>에 이르기까지 영화에서 본 사막 장면들 때문일 수도 있고. 새로운 촬영지가 중동 지역이라는 말에 가슴이 설렜던 이유도 아마 이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이슬람 세계에 발을 들일 기회였다. 광화문에 있던 회사에 다닐 때 근처에 누가 봐도 이슬람 양식으로 생긴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주한오만대사관이었다. 듣기로는 아예 처음부터 직접 지은 건물이기에 그런 외관을 띠게 되었다고 한다. 그 건물을 보면서 그 지역과 그곳에 있는 나라들은 어떤 곳일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영화 &lt;듄: 파트 2&gt; 촬영지, 아부다비 리와 사막(Liwa Desert) / 사진. ©구본숙
물론 개인 자격으로 여행하는 게 아니다 보니, 공식 일정으로 빡빡한 스케줄이라면 아무리 지척인들 사막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잠시 짬을 내어 사막에 다녀오고 싶었다. 물건을 살 때는 그렇지 않지만 멋진 말에는 금방 혹하는 ‘얇은’ 귀를 갖고 있기에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기에 아름답다.” 사막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불을 지르기에 이보다 나은 말이 있을까. 일정은 아부다비(Abu Dhabi)에서만 6박 7일을 보내게 되어 있었다. 아랍에미리트의 수도로 해안에 위치한다고 하니 바다 풍경도 볼 수 있을 터이고 치안도 좋다고 하므로 산책도 할 생각이었다. 꼭 낙타 등에 앉지는 않더라도 사막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낭만을 꿈꾸던 나로서는 잠깐 눈에만 풍경을 담은 채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아부다비 자이드 공항에 도착하니 안개와 새벽의 푸른빛이 포근하게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지역 전통의 흰색 옷인 칸두라를 입은 남성이 수하물을 트럭으로 옮겼고, 우리는 버스로 호텔로 이동했다.

도착한 당일은 일정이 없어서 오후를 사막에서 보내기로 했다. 피곤함도 있었지만, 호기심과 궁금증이 피곤함을 압도했다. 아직 완전히 나이 들진 않았다는 안도감과 나 나에 대한 대견함을 느끼며 마중 나온 차에 올라탔다. 모래를 발가락 사이로 느끼고 싶어서 슬리퍼를 신었고 카메라를 메었다. 마음은 이미 사막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잘 닦인 도로를 벗어나니 본격적인 듄 배싱(Dune Bashing, 오프로드에서 차량을 타는 활동)을 위해 차의 타이어에 바람을 뺀다. 처음에는 밋밋하기만 했던 사막이 좀 달리도 보니 경사가 심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6인승 SUV는 아무렇지도 않게 모래 위를 질주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하고 덥고, (밤에는) 춥고 바람이 많은 곳이 사막이라 했던가. 내려서 걷다 보니 입안으로 모래가 들어왔고 카메라가 괜찮을지 살짝 걱정도 되었다.바람을 통해 모래는 내 얼굴과 온몸에 달라붙었고 걸음도 잘 떼어지지 않는데도 웃음이 실실 나오고 좋기만 했다. 사막을 걸으며 뜬금없이 남극도 가야겠다는 생각도 갑자기 들었다. 인공의 흔적 없이 자연 그대로를 대할 수 있는 이 두 곳은 꼭 가야만 할 것 같았다. 이날의 여정은 사막의 노을을 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짧았다. 잠시 산책을 다녀온 것처럼 감질났다. 나중에 계획을 짜서 장기간 코스로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자들은 무대에 오르기 전 끊임없는 희생과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예술을 향한 열정과 깊은 고뇌를 표현하기 위해 감정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자신의 한계를 밀어붙이면서 음악과 하나가 되는 순간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번 서울시향 투어 협연자는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Sarah Chang)이었는데, 다들 그렇듯이 나 역시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본 적은 없다 보니 그녀가 무척 궁금했다. 5세에 데뷔해 현재까지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 연주자를 촬영하는 것만으로도 멋진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사라 장은 1년에 100회가 넘는 연주로 30년 넘는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지구는 몇 바퀴나 돌았을까. 화려한 기교와 뒤로 한껏 젖힌 허리, 하이힐이 늘 인상적인 연주자였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지만, 9세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자신만만한 포즈의 EMI 음반 커버가 기억난다. 1/4 크기의 바이올린으로 녹음한 음반으로,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음반이다. 일찍부터 음악성과 기교가 완성된 연주자였기에 대중은 신동의 탄생에 엄청나게 환호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빨간 옷차림인 걸 보면 취향인 듯하다.EMI 사장은 긴 설득 끝에 그녀와 전속계약을 맺었고, 녹음 스튜디오에서 연주하던 날 초콜릿과 인형을 한 아름 사들고 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후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 온 EMI 레이블이 110년의 역사를 끝으로 워너 뮤직으로 넘어갔고, 함께 녹음한 많은 지휘자의 영면을 보는 등 클래식의 영욕을 목격하면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2천년대 파가니니는 여자!’라고 프랑스 <르 몽드>에서 단언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사라 장을 가리키는 말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공연 예정 장소인 에미리트 팰리스 오디토리엄(Emirates Palace Auditorium)에서 열린 협연자 리허설에 그녀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특유의 눈화장과 긴 생머리를 팔랑거리면서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들어오는 모습은 활기차고 당당했다. 리허설은 촬영에 제한이 걸려 있어서 그 모습을 담아낼 수 없었던 게 아쉽다. 그녀가 리허설에서 발생한 여러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모습은 과연 나이 이상의 관록을 느끼게 했다.
[2024 서울시향 해외 순회공연] Abu Dhabi Classics 2024 -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with Jaap van Zweden &amp; Sarah Chang) / 사진. ©구본숙
공연장이 위치한 에미리트 팰리스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은 금커피로 소문난 곳이라고 한다. 이것도 경험이다 싶어 몇 모금 마시고 인터뷰 촬영장으로 갔다. 지금까지 여러 나라 공연장을 제법 보았는데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무대 위 오케스트라 의자는 꼭 식탁 의자처럼 보였고, 로비 쪽 VIP룸은 금빛으로 화려하게 치장됐지만 무대 뒤쪽 협연자 대기실에 가보니 흰 벽에 좁고 삭막한 느낌이었다. 보이는 곳에만 신경을 쓴 느낌이랄까. 공연 중에도 여러 관객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사진을 찍는가 하면 바로 SNS에 올리는 상황도 목격했다. 심지어 통화까지 하는 사람도…. 현지 미디어팀도 무대 근처까지 접근해 촬영할 정도이니 당황한 것은 나뿐인가 싶었다. 공연장 무대장식은 왠지 모르게 고대 이집트를 연상케 하는 데가 있었다.
[2024 서울시향 해외 순회공연] Abu Dhabi Classics 2024 -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with Jaap van Zweden &amp; Sarah Chang) / 사진. ©구본숙
다음날 본공연에 사라 장이 진한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등장했다. 그녀가 연주한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신비로운 분위기가 특징인 곡으로, 연주자와 잘 어울렸다. 그녀는 2악장에서 어둡지만, 매력적인 선율을 자아냈으며, 3악장에서는 활기와 박력 넘치는 연주를 선사했다. 이날 사라 장의 모습은 현대판 클레오파트라 같았다.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외모는 실제로 알려진 바 없고, 찌그러진 동전에 옆얼굴이 새겨진 게 유일하다.

지성과 카리스마,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대화술로 카이사르를 비롯한 당대의 영웅들을 사로잡은 덕에 시간을 초월해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고대 이집트를 닮은 공연장에 섰기 때문인지 몰라도 이 시대의 사라 장이라는 예술가가 클레오파트라와 겹쳐 보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마지막 순간에 줄을 잘못 선 것 때문에 파멸의 길로 걸어갔지만, 그때까지는 숱한 위기를 매력과 지혜로 헤쳐 나간 여걸이었다.
[2024 서울시향 해외 순회공연] Abu Dhabi Classics 2024 -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with Jaap van Zweden &amp; Sarah Chang) / 사진. ©구본숙
아마 사라 장에게도 분명 많은 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공연 중 한쪽 팔을 잡고 턱을 한껏 쳐든 채 안정을 취하는 모습을 촬영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허리를 엄청나게 뒤로 젖혀 활을 긋는 특유의 자세는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강력한 무기이다. 짙은 화장을 한 눈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이집트 벽화를 보면 고대 이집트 여성들도 눈가를 짙게 화장하지 않았던가.

눈화장하면 신의 보호를 받는다는 믿음이 있었다던가. 실제로 짙은 눈화장은 사막의 뜨거운 모래바람으로 금방 마르곤 하는 눈을 자극해 눈물로 안구를 적시는 효과가 있었다고 하니 나름대로 근거 있는 미신이었던 셈이다. 화장이 주술과 치료의 의미를 뛰어넘어 미의 행위로 인식된 것은 클레오파트라 때부터라고 한다. 스모키 화장의 원조는 클레오파트라였던 셈이다. 사라 장의 짙은 눈화장을 보면서 클레오파트라가 생각난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클레오파트라 / 사진=필자 제공
공연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도, 사실 내가 있고 싶은 곳은 다른 데였다. 사막 한가운데서 불을 피우고 고운 모래 위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며 잠드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소리에 민감하다는 사막여우도 보고 싶었다. 달이 유달리 가까워 보이는 밤하늘을 보면서 호텔로 이동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 장을 본 것도 사막을 본 것 못지않게 감동적이고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셰이크 자이드 모스크(Sheikh Zayed Grand Mosque)라는 모스크에서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카펫을 보았다. 화려한 도안과 색상이 경이로웠다. 또 아부다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 있는 궁전인 카스르 알 호슨(Qasr Al Hosn)에 있는 박물관에서 카펫을 짜는 여인들을 보았다. 여러 종류의 카펫이 있는데, 촘촘하게 잘 짠 카펫을 만들려면 어린 시절부터 카펫 짜는 법을 배워야 한단다. 이런 전통 카펫은 기계로 짠 것보다 훨씬 더 튼튼하다고 한다.

실을 규칙적으로 얽어서 만든 카펫은 장식적 요소, 도해적 가치, 예술적 관념이 한데 얽힌, 복잡한 범주의 작품이다. 수공예품이 지닌 이런 가치를 이해한 시인들은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기도 했다. 대리석 바닥에 깔린 카펫을 가득 채운 아라베스크(Arabesques), 흔히 당초 무늬라고 부르는 무늬를 넣어 마치 정원 같은 인상을 주는 그 문양은 자연이면서 인공이었고 그 둘이 합일된 표현이었다.
셰이크 자이드 모스크(Sheikh Zayed Grand Mosque) / 사진. ©구본숙
음악에도 아라베스크라는 장르가 있고 슈만이나 드뷔시 같은 작곡가가 그 장르의 음악을 썼다. 연주자 역시 어려서부터 많은 연습을 거치기에 튼튼하게 단련되어 아라베스크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신동은 이제 없지만, 어느덧 이 시대의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하나가 된 사라 장을 보면서 역시 예술에는 수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이 예술가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내고 싶다. 카펫도 세월이 지나면 삭거나 색이 바래듯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늙어가지만, 그 예술만은 길이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술을 보거나 들으면서 그 뒤에 있는 사람을 생각한다. 그렇게 떠올리는 이미지는 시간을 초월해 주름 하나 없이 찬연한 모습이다. 마치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클레오파트라의 모습처럼 말이다.

구본숙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