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이 귀하지 않은 시대에 작은 저항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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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최효안의 아트 벨베데레
패스트 패션(Fast Fashion) 시대, 옷의 근원적 의미를 묻다 [2편]
일본 패션 브랜드 '미나 페르호넨' 대표 디자이너
미나가와 아키라와의 단독 대담
주경야독하며 日문화복장학원에서
패션의 기본을 익힌 뒤 ‘미나 페르호넨’ 창업
창업 초 어시장에서 참치 손질 등 갖은 고생 끝에 세계적 브랜드로 성공
독특한 원형이 연속되는 ‘탬버린’ 문양 등
공들여 만든 예술성 높은 원단으로 승부
일본 각지 원단 공방과 협업
옷을 만드는 전 과정 장인들과 지속 가능한 상생 추구
옷은 삶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기억하는 소중한 저장 장치... 옷이 귀하지 않은 시대에 작은 저항을 하고 싶다. 좋은 기억을 주는 좋은 옷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고 싶다.미나가와 아키라 대담 中
미나가와 아키라의 첫인상은 일본이 낳은 세계적 브랜드를 총괄하는 디자이너라기보단, 오랜 기간 몸과 마음을 수련한 요가 마스터 같은 느낌이었다. 눈빛이 형형하고 마르고 단단한 몸. 입고 있는 옷도 정갈한 먹색에 가까운 검정색 상·하의로 마치 수도사의 옷 같았다. 아름다운 문양과 독특한 컬러로 유명한 ‘미나 페르호넨’을 탄생시킨 사람이니, 뭔가 상당히 패셔너블할 것이란 예상을 여지없이 깨는 등장이었다.
자신이 만든 옷처럼 자수나 문양이 고운 옷을 입지 않은 이유도 명확했다. 그런 옷을 입으면 거기에서 영향을 받은 유사한 디자인이 나올 수 있어서 지양한단다. 그 어디서나 보지 못한 문양과 자수를 만들어 내기 위해 정작 자신의 옷은 극도로 절제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업을 대하는 곧고 바른 성미, 결기(結己)가 느껴졌다.고교 시절 육상선수였지만, 대학 입시에 실패한 뒤 찾은 유럽에서 패션쇼 아르바이트를 통해 패션을 천직으로 삼기로 결정한 미나가와 아키라. 그런데 그 이유가 참 엉뚱하고 재미있다.
"바느질을 해보니 잘하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오랫동안 해나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일은 금방 포기하기 마련인데 그는 반대였다."능력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잘하지 못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거다”
그는 이런 마음으로 창업 초 어려운 시기 어시장에서 참치 손질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계속 옷을 만들었다. 30년간 한 우물을 파온 미나가와 아키라가 들려준 삶과 패션 이야기. (미나가와 아키라 인터뷰는 2024년 10월 서울 DDP에서 진행됐다)▷ 유행에 따라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이 유행하는 시대입니다. ‘미나 페르호넨’은 정성껏 옷을 만드는 ‘슬로우 패션’을 지향하는데요. 옷이 너무 흔한 시대에 어떤 이들은 미나 페르호넨의 ‘슬로우 패션’ 정신이 옷에 지나친 의미 부여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옷은 그냥 옷일 뿐이다”라며 말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아, 저도 옷은 그냥 옷이라고 생각합니다. (웃음) 다만 저는 옷에 대한 의미가 점점 사라지는 세상에서 작은 저항을 하고 싶어요. 저는 옷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일종의 건축,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나가와 아키라는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옷으로 막거나, 너무 추울 땐 야외에서 옷을 덮는 등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 옷이 건축이라고 표현했다)
저는 삶을 지탱하는 것은 좋은 기억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좋은 기억은 단순히 행복한 순간만이 아닌 희로애락이 전부 들어 있는 거죠. 그런 기억이 새겨지는 순간에 함께하는 옷을 만들고 싶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그 옷만 보면 기억이 떠오르도록.
그래서 전 특별한 순간에도 평범한 나날에도 언제나 입을 수 있는 좋은 옷을 정성을 다해 만듭니다. 누군가의 일생에 오래도록 머물러야 하니까, 옷의 내구성은 기본이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원단의 품질이 좋아야죠. 문양이나 디자인도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게 만들려고 노력하고요."▷ 당신은 매우 우연하게 패션에 입문했고, 30년 만에 ‘미나 페르호넨’을 성공시켰습니다. 좋은 옷을 뛰어난 장인들과 협업해서 만들지만, 턱없이 높은 가격을 매기지 않는 대신 할인 판매는 하지 않는 등 자신만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성공했죠. 무척이나 운이 좋은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인생은 운명으로 지배되나요? 아니면 결국은 노력인가요?
"저는 노력은 말 그대로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명은 그저 다가오는 것이니 알 수가 없죠. 그러나 다가오는 운명이라도 자신이 노력을 하고 있지 않으면, 운명을 알아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운명이 자신을 어떻게 바꿀지는 결국 노력을 해야 그 향방을 알 수 있는 거겠죠."▷ 당신의 책(<살아가다 일하다 만들다>, 퍼블리온, 2024)을 읽고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이 ‘옷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기로 결심한 다음 절대로 중단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부분입니다. 어떤 이들은 재능이 없으면 빠른 포기를 권하기도 합니다. 당신에게 패션 말고도 재능있는 다른 분야가 있을 수도 있는데, 당신이 그렇게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처음에 옷을 접한 것이 파리 패션쇼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어요. 당시 저의 바느질 실력은 정말 형편이 없었죠. 근데 못해서 그만둔다면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니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미 없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 단지 포기하지 않는 것만 정해놓고 해보자. 그렇게 생각했죠. 사실 무슨 일이든 못할 때는 못하니까 재미가 없고, 의미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못 하는 일이니 잘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오히려 내가 오랫동안 해나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잘하지 못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거라고 말이죠."▷ 당신은 무수히 힘든 상황을 이겨내고 결과적으론 자신의 브랜드를 성공시킨 사람입니다. 지금 한창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요즘은 작은 실패도 매우 큰 실패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패도 너무 두려워하죠. 저는 목표를 크게 세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목표 설정을 크게 했을 때는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것을 그저 작은 실패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표를 세운 다음은 목표 달성이 아닌 그것을 위해 가는 고된 과정이 중요합니다. 고됨은 단단한 씨앗과 같아서 그 고됨을 인내하면 싹을 내고 곧은 뿌리를 낼 수 있고 꽃도 피울 수 있습니다.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 과정에서 고난과 시련, 장애물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이 중요해요. 무엇을 이루기 위해선 고통스러운 과정이 있고, 결국 인생은 그 과정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결정합니다."▷ 현재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옷 만드는 일 이외에 당신을 지극하게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 있나요?"저는 일과 개인적인 삶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커피를 만들거나 요리를 할 때도 디자인에 대한 영감이 떠오를 때가 많습니다. 저에게는 단순히 옷을 만드는 시간과 생각하는 시간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방금 저에게 주신 첫 질문에서 정신이 번쩍 드는 신선함을 느꼈습니다. 내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이 되짚어볼 계기가 됐으니까요.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을 마주했을 때 굉장히 큰 기쁨과 행복, 그리고 의미까지 느끼게 됩니다."
최효안 예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