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들 살았던 오래된 주택가에, 창이 작은 카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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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조원진의 공간의 감각지금도 서울의 어느 성곽을 지날 일이 있을 때면, 지난번에 보았던 벽돌의 위치가 바뀌지는 않았을지 유심히 살펴본다. 김승옥의 소설 ‘역사(力士)’에 나온 구절이 오랫동안 잊지 않기 때문이다.
신당동 피어커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역사(力士) 서씨는 새벽이 되면 성문으로 향한다. 그러고 나서는 ‘성벽을 이루는 금고만한 돌덩이’를 맨손으로 들어 올려 돌들의 위치를 서로 바꾼다. ‘과거에는 힘과 명예의 원천’이었던 그 힘을 숨기다, 먼동이 트기 전에 몰래 나서 역사(力士)의 역사(歷史)를 이어가고 있다. 역사의 힘은 ‘대대로 가보로 여겨질 만큼 귀한 능력’이었다.하지만 현대화된 사회에서 그 힘은 ‘공사장에서 남보다 약간 더 많은 보수를 받게 하는 기능’만 겨우 하고 있다. 물리적인 역사의 힘보다 보이지 않는 물질적 가치들이 중요해지자 우리의 삶도 빠르게 변했다. 성벽은 더 넓고 효율적인 도시를 위해 헐렸고, 그 위로 빠른 삶을 위한 도로가 깔리고 더 부유한 삶을 원하는 이들이 아파트를 지었다.
남소문이라고도 불렸던 광희문은 본래 조선시대 한성부의 시신을 묘지로 운구하는 통로였다. 이 때문에 광희문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무녀촌이 형성되었고, 인근 지역을 신당(神堂)동이라 부르곤 했다. 갑오개혁 때에 이르러서야 이 명칭은 부정적인 의미를 쇄신하기 위해 신당(新堂)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서울이 되어 신당1동부터 6동까지 행정적인 구분이 일어났고, 2013년이 되어서는 신당동, 다산동, 약수동, 청구동, 동화동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시간이 흐르고 성벽의 흔적은 가까스로 복원된 유적의 일부로만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동네의 이름 또한 그 유래의 작은 흔적만 남기고 모두 변했다. 하지만 누군가 보지 않는 곳에서 성벽의 돌덩이를 옮기는 역사의 모습처럼, 과거의 흔적들은 기묘하게 숨 쉬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주택 보급을 빌미로 훼손되기 시작한 성벽의 일부가 주택의 담장이나 축대로 활용됐기 때문이다. 일부 주택들은 성벽 위에 짓기도 했고, 지금도 주택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흔적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피어커피의 광희문 매장 건물도 성벽의 오래된 흔적을 가진 주택이다. 1944년에 지어진 이 오래된 주택의 벽은 성곽을 따라 2층 높이로 지어졌고, 성곽의 일부가 벽이 되어 일반적인 벽 두께의 3배에 이를 정도로 두꺼웠다. 성곽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실제로는 2층이 1층의 역할을 하는 것도 특이한 부분이다. 피어커피의 대표 황진욱은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마주한 역사의 흔적에 상서로움을 느꼈고, 망설임 없이 이곳에 새 지점의 문을 열겠다고 결심했다. 오래된 주택 특유의 두꺼운 벽과 그곳에 가까스로 낸 작은 창, 잘 관리된 서까래가 근사하게 보이는 천장은 서울에는 얼마 남지 않은 역사의 정취가 가득했다.황진욱은 그 정취를 최대한 살려 매장을 꾸리고자 했다. 인테리어를 완성하는 가장 핵심이 되는 소재는 목재였다. 나왕(Lauan)과 같은 원목부터 무늬목 같은 가공목,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고재(古材)까지 활용해 바닥과 계단을 만들었고, 벽과 창들을 꾸몄다.
선반과 의자, 테이블의 소재도 모두 목재를 활용했다. 1층에서부터 이어지는 나무의 길을 따라가면 2층에 이르러 조명이 빛나고 있는 서까래를 마주할 수 있는데,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면 어디선가 돌을 옮기고 있을 역사(力士)의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역사의 이야기는 2층 좌석에 앉으면 시선을 마주할 수 있는 창문으로도 이어진다. 아파트 등 단열 소재가 발달한 지금의 주택은 대체로 넓고 큰 창을 가졌다. 또, 해가 잘 드는 곳으로는 발코니를 내어 햇볕을 최대한 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역사가 짧게는 50년, 길게는 100년 가까이 되는 신당동의 고택들은 제대로 된 단열이 어려워 창문도 길고 좁게 낼 수밖에 없었다.
또 두꺼운 벽이 그 자체로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기둥의 역할도 하기에, 함부로 창의 크기를 키우거나 그 수를 늘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니 창문은 필요한 곳에 가장 최대의 크기를 갖춰 내었고, 현대인들의 시선으로는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법한 모양새를 갖췄다.하지만 황진욱은 오히려 작은 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이곳만의 정취라고 생각했다. 담쟁이넝쿨이 수묵화처럼 벽을 가득 채운 모습이나, 지금은 볼 수 없는 작은 타일을 수없이 이어 붙인 건물 외벽은 그 자체로 역사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창의 크기를 일부러 늘리지 않고,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역할에 충실하게끔 둔 것은 오래된 주택을 대하는 그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역사를 어떻게 대할지 마음을 정했으니, 그는 마지막으로 커피를 두는 일에 대해 고민했다. 동료, 친구라는 뜻을 담아 ‘피어(Peer) 커피’라는 이름을 정했듯이, 이곳의 바리스타들은 항상 친구와 같은 따뜻함을 품고 손님들을 맞이한다. 그래서 커피를 제조하고 손님에게 전달하는 1층은 아늑한 2층의 풍경과 달리 유리로 파사드(Façade, 입면)를 내어 화사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꾸몄다.오래된 주택가와 상점이 자리를 지켜온 이 거리는, 여느 번화가처럼 마땅한 카페가 손에 꼽을 만큼 없었다. 피어커피처럼 스페셜티커피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매장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피어커피는 매장을 꾸려나가는 과정부터 인근 목재상과 페인트 가게, 철물점과 설비업체 등과 함께 했다. 오래된 건물을 잘 돌보고자 하는 그 마음 덕분에, 매장은 문을 열기도 전에 동네의 분위기에 빠르게 녹아들었다.기묘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신당동은 남산 인근 고도 제한으로 인해 오랫동안 재개발이 무산되곤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 성곽이 들어섰고, 극적인 협상 끝에 일부 지역의 재개발이 확정되기도 했다. 혹자는 서울의 마지막 재개발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낙후된 지역을 되살리는 일이 오직 아파트를 세우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 서울의 숨겨진 풍경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풍경 속에 카페를 열고자 하는 피어커피의 노력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이 더 빈번해질 수 있도록, 커피 한 잔을 내어주고 마시는 일이 역사(力士)의 역사(歷史)를 이어가는 것처럼 고요하고 숭고하기를 바란다.
조원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