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주식으로 상속세 낸 기업, 40%는 문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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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지 꺾는 징벌적 상속세의 덫대주주가 현금 대신 주식으로 상속세를 낸 기업 10곳 중 4곳은 문을 닫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영 환경도 어려운데 지분 대부분을 상속세로 정부에 넘긴 뒤 더 이상 가업을 이어갈 의지를 상실한 탓으로 풀이된다. 이렇게 물납받은 주식 중 정부가 매각을 통해 현금화에 성공한 비율은 10곳 중 한 곳에 그쳤다. 최고 세율이 60%에 달하는 징벌적 상속세가 기업의 영속성을 해칠 뿐 아니라 세수 확보에도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997년 이후 주식물납 기업 311곳 중 126곳 휴·폐업
받은 주식 매도 어려워…걷은 세수 사실상 휴지조각
19일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이 기획재정부에서 받은 ‘물납증권 연도별 수탁 현황’ 자료에 따르면 기재부가 1997년부터 올해 9월까지 주식 물납으로 상속세를 받은 기업 311곳 중 휴·폐업한 회사는 126곳으로 40.5%에 달했다. 대부분 상속세를 내고 난 뒤 수년 안에 문을 닫았고, 서너 달 만에 파산한 사례도 있었다.
주식 물납 제도는 최대주주가 상속세를 낼 충분한 현금이 없을 때 주식으로 대신 납부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정부는 이렇게 받은 주식을 시장에 공개 매각해 현금으로 회수한다. 하지만 2011년 이후 올 9월까지 기재부가 주식 물납 제도를 통해 받은 비상장 주식 6조2795억원어치 중 현금화를 완료한 금액은 6955억원(11%)에 그쳤다. 4조7000억원어치에 달하는 넥슨 지주사 NXC 지분 29.3%를 제외하더라도 현금화 성공 비율은 44%에 불과하다.
물납 주식의 현금화가 어려운 이유는 대부분 경영권이 없는 지분이어서 사 가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40%는 휴·폐업해 휴지 조각이 됐기 때문이다. 정부가 처분하지 못해 주식을 보유 중인 기업은 NXC를 포함해 166개에 달한다. 총평가액은 6조929억원이다. 특히 NXC 같은 대기업 주식은 상속세를 부과받을 때 최대주주 할증이 적용돼 매각이 더욱 어렵다. 정부가 취득한 가격이 시가보다 높기 때문이다. 정부는 두 차례 유찰을 거친 뒤에야 할인한 가격에 내놓을 수 있다.박 의원은 “징벌적 상속세 과세로 일부 기업은 폐업으로까지 내몰리고 있다”며 “원활한 기업 승계를 지원하기 위해 최대주주 지분 할증 평가 폐지, 상속세율 인하 등으로 세제의 패러다임을 확실히 전환할 때”라고 지적했다.
기업, 주식 내주고 경영의지 상실…정부, 6兆 걷고도 11%만 현금화
주식으로 상속세 낸 기업 10곳 중 4곳 문 닫았다
비상장사인 A사는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건실한 제조업체였다. 그러나 2012년 창업자가 사망한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상속인들은 20억원대 상속세가 나오자 지분 33%를 현금 대신 정부에 물납했다. 이후 제조업을 포기하고 순수 판매 법인으로 전환했다. 지분도 줄었는데 업황이 어려운 제조업을 이어갈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서다. 이후 회사 순이익은 매해 줄었고 공매가는 지난해 1억8700만원까지 떨어졌다. 그러다 같은 해 회사는 결국 폐업했다. 정부 보유 지분은 휴지조각이 됐다.최고 세율이 50%(최대주주 할증평가 시 60%)에 달하는 징벌적 상속 세제는 이같이 중견·중소기업들이 가업 승계를 포기하는 주된 이유가 되고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제조업을 유지해온 창업자가 사망하면 상속인에게 현금으로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상속세가 부과되고, 상속인은 주식으로 세금을 치르고 난 뒤 경영 의지가 꺾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모펀드(PEF) 등에 회사를 매각하면 운이 좋은 경우고 그마저 여의치 않아 회사를 접는 선택을 하는 상속인이 많다는 게 경영계의 설명이다.○주식 물납 석 달 뒤 폐업
19일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이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서 받은 주식 물납 사례 자료를 보면 실제로 상당수 기업은 상속세를 부과받은 뒤 가업 승계를 포기하거나 경영이 악화해 문을 닫았다.2012년 15억원대 상속세를 고지받은 교통신호 제어기 업체 B사가 대표적 사례다. 현금이 없어 15억원의 상속세를 주식으로 물납하기로 했지만 수탁 직전 폐업했다. 다른 세금까지 체납한 형편에 가업 승계가 어렵다고 봤기 때문이다. 물납 주식은 공매 시장에 나오지도 못한 채 가치가 0원이 됐다.건설업체 C사도 같은 해 2억8000만원의 상속세를 주식으로 냈지만, 이 과정에서 주주 간 상속 분쟁이 생겼다. 결국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정부는 지분을 끝내 팔지 못했다. 같은 해 파산한 또 다른 기업은 물납 후 3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업황이 어려운 가운데 과도한 상속세는 기업에 더욱 큰 부담이 됐다. 건설업체 D사는 2013년 19억4000만원어치 주식을 물납했다. 이후 건설 경기 악화와 금리 상승이라는 이중고가 한꺼번에 닥쳤다. 영업 부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회사는 2018년 문을 닫았다.
내연기관 제조업체 F사도 2018년 36억4000만원어치 주식을 상속세로 물납했지만 이 주식은 공매 시장에 나오지 못했다. 상속세를 납부한 해 관계사가 부도나면서 회사가 덩달아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같은 해 9월 폐업했다.
○정부 세수 확보에도 ‘빨간불’
징벌적 상속세는 기업을 병들게 할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정부의 세수 확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는 올해도 2159억원어치 비상장 주식을 상속세 대신 받았지만 현금화한 주식은 193억원어치에 불과했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수탁받은 주식 5조2516억원(NXC 제외 시 9816억원)어치 중 매각에 성공한 주식은 2569억원어치에 그쳤다.정부가 보유 중인 비상장사 166곳의 주식 중 물납 시점보다 평가 금액이 줄어든 곳이 39곳(23%)에 달한다. 나머지는 가치가 동일하거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업황에 따라 기업 가치가 유동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공매 시점의 지분 가치는 예상하기 어렵다.물납받은 주식은 구조적으로 매각이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원매자인 기업이나 사모펀드는 경영권을 확보하는 게 중요한데, 상속세 대신 낸 주식은 대부분 50%를 넘지 않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정부가 보유한 물납 주식 중 정부 지분율이 50% 이상인 경우는 1.9%에 불과했다. 반면 10% 미만이 58.5%, 10~20%가 20.0%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