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빈 '시라노' 번역가 "공연 번역은 말이 아닌 정서를 옮기죠"

“나의 언어는 화려한 꽃다발이 아닌, 그늘 속의 단검이니…"
뮤지컬 '시라노'의 김수빈 번역가
'스위니 토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 번역

"해외 뮤지컬 속 희로애락,
한국관객에게 전하려면 재창조해야"

"'시라노'의 본질은 '낭만',
코미디와 사랑으로 울림 전해질 것"

다음달 6일부터 내년 2월 23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정서를 번역하는 일이 가장 중요해요. 비싼 티켓값을 내고 관객들이 공연을 보는 건 일상에서 느끼기 어려운 카타르시스를 느끼러 오시는 거니까요."

'미국식 유머', '한국식 유머'라는 말이 있다. 한 문화권에서 통하는 개그가 의미 그대로 번역돼도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말하면 분위기가 싸해질 수 있다. 공연 번역가 김수빈이 "정서를 번역한다"고 표현한 이유다. 음악과 대사로 희로애락을 무대 위에서 그리는 뮤지컬은 만들어진 나라의 정서와 문화가 진하게 배어 있다. 그렇기에 뮤지컬을 단순하게 직역하게 되면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공연이 될 수 있다. 해외에서 만들어진 작품을 보고도 한국 관객이 웃고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감정을 옮기는 일'이 공연 번역가의 임무다.
김 번역가는 10년째 무대 뒤에서 '감정을 옮겨온' 국내 대표 공연 전문 번역가 중 한명이다. '스위니 토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물랑루즈!' 등 뮤지컬들은 공연 애호가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거나 본 적이 있을 굵직한 작품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지난 22일 만난 김 번역가는 개막을 앞둔 뮤지컬 '시라노'의 준비에 한창이었다. '시라노'는 18세기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뛰어난 검술과 언변을 겸비했지만, 코가 기형적으로 큰 추남 시라노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록산이라는 여성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외모 때문에 고백하지 못하고 그의 친구 크리스티앙을 통해 사랑을 전하는 절절한 이야기다. '지킬 앤 하이드', '웃는남자' 등 음악으로 사랑받는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의 대표작 중 하나다.2017년, 2019년 이후 세 번째로 열리는 시즌이지만 마치 초연 공연 같은 준비 과정을 밟고 있다고 김 번역가는 설명했다. 달라진 무대에 새로운 음악도 추가되고 대본도 각색을 거쳤다. 그에 맞춰 감 번역가도 번역 작업도 새로 하는 중이다.

이전보다 더 적극적인 각색이 가능했던 이유는 '시라노' 대본의 원작자인 래슬리 브리커스의 빈자리다. 브리커스가 2021년 타계한 후로 처음 공연하는 이번 시즌을 앞두고 브리커스의 제자인 프랭크 와일드혼은 이번에는 "더 도전해보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김 작곡가는 "브리커스 선생님의 유산을 지키면서도 관객들에게 새로운 공연을 보여줄 방법을 고민했다"며 "초연, 재연 공연 사이에 균형을 잡도록 노력 중이다"고 말했다.

이전 공연과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을 물었다. 그는 "시라노는 웃기면서 슬픈, '웃픈(웃김+슬픈) 작품"이라고 설명하며 "지난 시즌까지는 코미디적인 요소가 강했다면 이번에는 슬픈 감정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간 공연"이라고 소개했다.
이처럼 작품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번역가가 맡은 임무는 막중하다. 번역은 단지 말을 옮기는 걸 넘어 '감정'을 전하는 일이다. 김수빈 번역가의 '윤색 작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장면의 핵심이 되는 감정을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현지화하고 재구성하는 일을 말한다. 장면의 설정만 남겨두고, 아예 새로운 대화를 만들기도 한다.

"어떤 장면의 본질적인 '정서'가 무엇인지 포착해야 돼요. 그러고 나서 그 감정을 한국 관객에게 어떻게 가장 잘 전달할지 고민하죠. 그 정서를 최대한 풍성하게 해서 공연이 끝나도 관객들이 집에 가져가도록 하는 게 목표죠."
이번 공연으로 김 번역가가 전하고 싶은 '시라노'의 본질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낭만'이라고 말했다. 김 번역가는 "낭만은 사랑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는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며 "'어떤 가치를 지키고 싶은가',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질문을 코미디와 사랑으로 꽁꽁 싸매 울림과 카타르시스가 모두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마지막으로 김 번역가가 번역 작업을 하며 가장 인상에 남은 대사를 물었다. 그는 시라노가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록산에게 고백하는 장면을 꼽았다.

“나의 언어는 화려한 꽃다발이 아닌, 그늘 속의 단검이니, 이 검의 울림을 그대의 빛에 새길 수 있게 해줘요"

뮤지컬 '시라노'는 오는 12월 6일부터 내년 2월 23일까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구교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