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에 박세리까지 끌어들이다니…"골프는 죄가 없다" [이슈+]
입력
수정
정치권 끊이지 않는 골프 논란"골프의 단점은 너무 재밌다는 것이다." 골프에 각별한 애정이 드러나는 이 말, 모순적이게도 "공직 기강을 세우겠다"며 '골프 금지령'을 내린 고(故)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말입니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골프장(1921년·효창원 골프장)이 생긴 지 어언 100년입니다. 골프가 대중 스포츠로 자리 잡기 전까지는 '부르주아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YS도 이런 점을 의식해 금지령을 내렸을 겁니다.
문제는 골프 아니라 때와 장소
하지만 골프 유입 후 1세기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골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국내 골프 인구는 500만명을 넘어섰고, 더 이상 부자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지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그런데도 골프는 예부터 지금까지 쭉 많은 정치인의 발목을 잡아 오고 있습니다. 왜 정치인들의 골프 논란은 끊이질 않는 걸까요. 골프업계와 정치권 관계자들은 "골프엔 죄가 없다"고 입을 모읍니다.
尹 대국민 사과 이틀 후 골프…박세리 끌어들인 與
가장 최근 골프로 진땀을 빼고 있는 건 윤석열 대통령입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 7일 배우자 김건희 여사 문제 등으로 국민들 앞에 고개 숙여 사과했는데요. 이틀 뒤 골프장 잔디를 밟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시의 부적절성을 지적하고 나선 민주당은 "제정신이 박힌 대통령이라면 골프장 대신 민생 현장을 찾아야 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는데요. 하지만 여권은 '골프 영웅' 박세리까지 소환하며 윤 대통령의 골프 활동은 문제 될 게 없다고 반박했습니다.정성국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20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대통령은 골프 치면 안 되나. 1997년 박세리 선수가 있지 않았나. IMF 외환위기 시절, 박찬호의 메이저리그와 박세리의 골프는 많이 회자됐던 내용"이라며 "거의 30년 전인데도 박세리 선수가 그런 큰 성과를 이뤘을 때 국민들은 박수를 쳤다"고 감쌌습니다.대통령실은 '골프광'으로 알려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의 '골프 외교'를 대비한 연습의 취지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골프 외교도 있다 할 정도로, 만약 트럼프 당선자가 우리 대통령에 라운딩하자 했을 때 골프를 전혀 못치는데 라운딩에 응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습니다.
홍 수석은 그러면서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골프 문제가 이렇게 비난의 대상, 정쟁의 대상이 된 적 없다"고 토로했는데요. 이와 달리 골프는 오랜 시간 정쟁의 중심에 서 왔습니다.
"역대 정부서 골프 정쟁 된 적 없다"?
대표적인 사건이 2006년 참여정부 시절 이해찬 총리의 '3·1절 골프' 파문입니다. 3·1절에 골프를 친 자체만으로도 문제였지만, 당시 철도파업으로 비상인 상황에서 총리가 골프를 친 것이라 더욱 논란이 됐었습니다.당시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은 "국무보다 골프를 좋아하는 이 총리는 골프를 계속 치도록 해드리는 것이 국민 된 도리"라면서 사퇴를 거세게 압박했고, 결국 이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하고 대국민 사과까지 진행한 뒤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2008년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교체된 해 8월, 이때는 허태열 한나라당 최고위원 등 당시 여권 인사들이 '광복절 연휴'에 일본으로 골프 여행을 다녀와 구설에 올랐습니다. 또 같은 기간 정세균 민주당 대표도 때마침 국내에서 골프를 쳐서 빈축을 샀습니다.
2009년 1월에는 박영선 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 9명이 임시국회 회기 중 부부 동반으로 태국에 골프 여행을 갔다가 물의를 빚었습니다. 특히 박 의원은 약 10년 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국정원이 미행하지 않았다면 민주당 의원들이 여행 가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라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비교적 최근인 2023년에도 홍준표 대구시장이 '수해 골프' 논란을 빚어 곤경에 처했습니다. 홍 시장은 그해 7월 15일, 충청과 영남 지역에 집중호우가 쏟아지던 당시 대구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는데요. 홍 시장은 "대구에는 수해 피해가 없었다"며 떳떳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다가, 결국 당 징계를 비롯한 전방위 압박에 고개를 90도로 숙였습니다.이처럼 골프와 정치인의 질긴 악연. 골프채를 잡기 전 딱 한 번만 고민하면 끊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한 캐디는 "지금 골프 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세간의 시선을 전혀 신경 안 쓰고 라운딩을 나오는 정치인들이 이따금 있다"고 전했습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일부 정치인들이 문제이지, 골프엔 죄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