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정부 지원으로 혹한기 버티는 스타트업들

'투자 겨울'에 지원사업 경쟁률↑
혁신 틀어막는 규제부터 개선해야

고은이 테크&사이언스부 기자
“지원사업 경쟁률이 계속 높아지고 있어요. 투자시장 위축을 체감합니다.”

서울시 스타트업 지원 기관인 서울경제진흥원(SBA)의 김종우 창업본부장 얘기다. 그는 “추세는 작년부터 느꼈지만, 올해는 경쟁이 더 치열해졌다”고 말했다.올해 SBA의 바이오·의료 연구개발(R&D) 지원 사업 경쟁률은 20 대 1. 바이오는 최근 벤처캐피털(VC)의 투자 수요가 꺾인 대표적 업종이다. 김 본부장은 “초기 기업들이 이용했던 입주 지원 사업에 시리즈B 단계의 유명한 기업까지 신청이 들어왔다. 후속 투자 유치가 안 되다 보니 외형을 줄이고 공용 공간에 입주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투자 혹한기가 길어지면서 생존을 위해 지원 사업에 기대는 스타트업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최근 리포트에 따르면 2022, 2023년 창업자들은 혹한기 대책으로 비용 절감과 매출 다각화를 언급했다. 올해는 달라졌다. 정부 지원 사업을 추진해 버티겠다는 창업자가 절반(49.6%)이나 됐다. 2022년(24.0%)의 두 배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허리띠는 졸라맬 만큼 졸라맸고, 신사업을 하려고 해도 자금이 없다”며 “정부 지원 사업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민간 중심 벤처투자 생태계를 만들겠다며 모태펀드 예산을 줄였던 정부도 태도를 바꿨다. 시장이 악화하자 다시 투입 규모를 늘렸다. 벤처 시장에 돈이 안 돌아서다. 줄어든 민간 부문의 벤처펀드 출자를 공공부문 출자로 떠받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정부가 예산으로 스타트업을 육성하고 있는 건 이들 기업이 이끌 혁신이 미래에 국가적 이득으로 돌아올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스타트업 생태계가 정책자금에만 의존해 굴러갈 수도 없다. 단기 수혈보다 더 중요한 건 기업들이 자유롭게 혁신을 시도하고 투자자는 그 가치에 기꺼이 베팅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한 투자사 대표는 “지금은 창업자들이 아이디어가 있어도 못하는 게 너무 많다. 주요 영역이 규제로 싹 다 묶여 있다. 이것만 해결해도 투자할 만한 기업이 확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투자자는 “그레이 영역이 생기면 한국은 규제부터 한다. 인공지능(AI)만 봐도 데이터 활용 규제가 너무 세다”고 했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최근 조사에서 투자자들이 생태계 활성화를 위해 시급한 조치로 가장 많이 꼽은 게 ‘규제 완화’였다.

경쟁력을 갖춘 스타트업들은 해외로 조용히 본사를 옮기고 있다. 신산업의 등장을 규제로 계속 틀어막는다면 얼마 안 가 한국엔 지원 사업으로 겨우 연명하는 스타트업만 남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