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생만 믿다가 전기료 '폭탄 청구서' 받고…원전 다시 켠다

유럽 강타한 '녹색 정전'
글로벌 천연가스값 폭등

이달 날씨 '어둡고 바람 멈춰'
태양광·풍력발전 사실상 스톱
가스 수요 늘면서 가격 치솟아

신재생만 믿다 전기료 10배 뛴 유럽
사진=REUTERS
글로벌 천연가스 가격이 치솟고 있다.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유럽에서 흐리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이어지면서 ‘대체 에너지원’인 가스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유럽 가스 가격은 연중 최고치를 경신했고, 공급 과잉 우려로 하락세를 보이던 미국 천연가스도 5개월여 만에 최고가를 나타냈다.

21일(현지시간) 영국 런던ICE선물거래소에서 유럽 천연가스 벤치마크인 TTF 12월물 가격은 메가와트시(㎿h)당 48.720유로를 찍었다. 올해 들어 가장 높은 가격에 장을 마감했다. 이날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의 헨리허브(HH) 천연가스 선물은 MMBtu(열량 단위)당 3.509달러를 기록했다.

겨울철 한파를 앞두고 난방용 에너지 사용량이 급증한 데다 유럽 신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가 불거져 가스 가격을 밀어 올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상 조건에 따라 전력 생산이 오락가락하는 간헐성은 신재생에너지의 고질적 문제로 꼽힌다. 특히 이달 초중순부터 유럽에서는 ‘어둡고 바람이 멈춘 상태’라는 의미의 둥켈플라우테(Dunkelflaute)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풍속이 급격히 떨어져 풍력 터빈에서 전력 생산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하늘이 흐려 태양광 패널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녹색 정전’으로도 불린다.

녹색 정전 사태는 유럽에서 신재생에너지 설비를 대폭 늘린 뒤 매년 반복되고 있다. 이달 들어 약 2주간 영국과 독일, 북유럽 일부 국가를 연이어 강타했다. 이 기간 신재생에너지 발전량을 메우기 위해 석탄과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 발전량이 급증했다. 독일 아고라에네르기벤데에 따르면 통상 40~50%이던 독일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지난 6일 19.5%로 쪼그라들었다.

신재생에너지 전력공급 불안…천연가스 등 화석연료로 대체
英·북유럽서도 동시다발적 정전

독일은 이달 6일 육상풍력 일일 발전량이 0.14GWh(기가와트시)로 사실상 전무했다. 해상풍력과 태양광 발전량도 각각 6.82GWh, 42.64GWh로 연중 최저치를 보였다. 신재생에너지에서 모자란 전기를 대신하기 위해 경질 석탄과 갈탄,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 사용량을 대폭 늘렸다. 독일 프라운호퍼ISE에 따르면 이달 4일부터 10일 사이 신재생에너지는 전기 생산의 30%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70%는 전부 화석연료 에너지였다. 바람이 불지 않고 햇빛이 거의 나지 않는 ‘둥켈플라우테(Dunkelflaute)’ 현상의 여파였다.

○獨 전기 기업 대표의 경고

독일 유틸리티업계에서는 “기저전원 확충을 서둘러야 한다”는 경각심이 제기되고 있다. 독일 최대 유틸리티 기업 RWE의 마르쿠스 크레버 최고경영자(CEO)는 21일(현지시간) 링크트인에 “이달 초 독일의 전력 공급이 한계에 도달했다”며 “지난 6일 저녁 시간대에 전기요금이 ㎿h(메가와트시)당 800유로를 넘어섰고, 이는 평소보다 약 열 배 비싼 가격이었다”는 글을 올렸다. 그는 “다시 안정화되긴 했지만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둥켈플라우테에 대응하고 전력 수급 시스템 및 가격 안정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화석연료 등 기존 발전원의) 발전 용량을 축소하면서도 신재생에너지에 ‘백업 에너지’를 제공하지 않으면 어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지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업 에너지란 신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기 위해 배터리와 양수발전 등 에너지저장장치(ESS)를 확충하고, 전력 수입을 포함한 대체 공급원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재생에너지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가스와 석탄, 장작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체계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점에서다.독일에서는 이달 중순 이후 신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다시 안정화됐다. 하지만 녹색 정전 사태와 이에 따른 가스 발전 확대는 영국과 북유럽 국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 가스 가격을 급격히 끌어올렸다. 이달 초 영국에서는 풍력 발전이 오전과 저녁 최대 전력 수요 시간대에 전력 수요의 3~4%만 충족했고, 이에 따라 가스 발전소가 가동돼 약 60%의 전력 수요를 충당했다. 나머지 전력은 원자력, 장작 등 바이오매스와 전력망 연결을 통한 수입 전력 등이 채웠다.

○탄력받는 원전 르네상스

유럽에서는 신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가 부각되자 다시 원전에 대한 선호가 커지고 있다. 하비에르 블라스 블룸버그 에너지·원자재 전문 칼럼니스트는 9일 X(옛 트위터)에서 둥켈플라우테 문제를 지적하며 “메스메르가 고마울 따름”이라고 적었다. 1972~1974년 프랑스 총리를 지내며 프랑스를 원자력발전 강국으로 키운 피에르 메스메르를 지칭한 것이다.

‘녹색 정전 사태의 친환경적 해결책은 원자력뿐’이라는 공감대가 퍼지면서 유럽 국가는 잇달아 원전 복귀 및 확대를 선언하고 있다. 스웨덴(1980년 탈원전), 이탈리아(1987년), 스위스(2017년) 등 과거 탈원전을 결정한 국가는 원전 건설에 나서고 있다. 체코를 비롯해 프랑스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핀란드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등도 신규 원전 건설을 추진 중이다.글로벌 가스 가격은 계속 오름세를 보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세계 최대 경제국인 미국에서 천연가스가 석탄을 제치고 1위 발전원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전력 구성에서 석탄 비중은 15.8%로 떨어졌고 대부분 저렴한 천연가스로 대체됐다. 가스는 전년 대비 6.5%포인트 증가한 43%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