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겨울,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다… 오페라 '라보엠'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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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치니 서거 100주년 기념 서울시오페라단 제작 오페라“Il mio dramma, l’ardente mio dramma ci scaldi”
1985년 창단 이후 첫 제작 오페라
(나의 드라마는 우리를 뜨겁게 만들 것이다)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1858-1924)의 오페라 <라보엠>의 1막에서 자신이 쓴 시가 쓰여진 원고를 난로에 태우는 장면에서의 로돌포가 노래하는 대사다. 종이가 불에 타 추운 다락방의 온도를 높여준다는 의미와 함께 앞으로 전개될 보헤미안들의 러브 스토리가 예사롭지 않다는것을 암시하는 중의적 의미로 쓰여졌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시를 태우는 이 장면은 라보엠 속 보헤미안적 정신과 인생의 무상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1869년 푸치니의 지휘로 초연된 4막 오페라 <라보엠>은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의 사랑과 삶을 담아낸 베리스모(사실주의) 오페라로 <토스카>, <나비부인>과 함께 그의 3대 명작 중 하나다. 21일부터 24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서울시오페라단(단장 박혜진)의 라보엠은 푸치니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오페라로 국내 정상급 성악가들의 열연과 높은 수준의 사실적인 연출과 무대미술로 관객들의 찬사를 받았다.
명암 나뉜 콩쿠르 스타, 듣는 귀 높은 한국 관객 만족시켜야공연의 성공을 위해 서울시오페라단은 국제 콩쿠르 우승 경력이 있는 성악가를 대거 캐스팅했다. 특히 러시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우승자 소프라노 서선영과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 소프라노 황수미 두 명의 '미미'의 출연 소식은 오페라 팬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베르디 국제 콩쿠르 등에서 우승한 경력의 테너 김정훈이 로돌포 역을, 작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 바리톤 김태한이 마를첼로 역을, 차이콥스키 콩쿠르 준우승자 베이스 정인호의 콜리네역 출연 소식도 기대를 모았다. 서선영과 황수미 두 명의 '미미'는 각자의 개성이 넘치는 가창으로 공연의 1막과 3막에서 극의 중심을 이끌었고, 바리톤 이승왕과 김태한이 노래한 마르첼로는 저마다 보헤미안적 개성을 보여주며 경험과 연륜에서 오는 안정적인 A팀의 무대, 젊음의 에너지가 넘치는 B팀의 무대를 보여주었다.
무대에서 쌓은 경험과 연륜 돋보인 A팀의 무대 21일 첫 공연과 23일 미미 역 소프라노 서선영은 1막과 3막에서 압도적인 성량과 긴 호흡으로 울려낸 고음을 뽐내며 대극장의 열악한 건축음향을 자신의 기량으로 해결했다. 로돌포 역 테너 문세훈은 전성기 롤란도 빌라존의 고음을 연상케하는 음색으로 ‘그대의 찬손’의 깨끗하고 정확한 High C(높은 도)음정을 들려주며 큰 박수를 받았다. 무젯타 역 소프라노 김유미는 극중 남성들의 환심을 사는 발랄한 연기를 보여 웃음을 자아냈다. A팀의 마르첼로 역의 바리톤 이승왕은 자신감 넘치는 연기와 부족함 없는 가창을 보여주며 콩쿠르 경력보다 무대에서 쌓은 경험이 오페라 가수들에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했다.젊은 보헤미안의 에너지와 열정 넘친 B팀의 무대 22일과 24일 출연한 B팀의 콜리네 역 베이스 정인호는 러시아나 불가리아의 저음 가수 (Basso Profondo· 바소 프로폰도) 들의 가창을 연상케하는 풍성한 울림을 들려줬다.
소프라노 황수미는 동양인 같지 않은 뚜렷한 이목구비와 1막부터 4막까지 점점 쇠약해지는 미미의 가창으로 이탈리아의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를 연상케했다. 마르첼로 역 바리톤 김태한은 고급스러운 음색과 멀리 뻗어나오는 소리로 국내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기자 간담회에서 로돌포 역을 100회 이상 출연했다고 밝힌 테너 김정훈은 이탈리아의 마리오 델 모나코, 프랑코 코렐리 등의 발성법인 멜료끼 창법을 구사하는 듯 했으나 음량이 고르지 못해 가창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4막에서 미미가 죽는 장면의 대사 표현과 미미를 외치며 손을 떠는 연기는 일품이었다.
보기 드문 국립심포니의 세종문화회관 무대 원정
지휘자 최희준이 이끈 국립심포니는 성악가들의 템포를 섬세히 받쳐주며 극의 완성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특히 2막 무대 위의 스네어드럼(작은북)과 피콜로, 트럼펫 등 반다 연주자들은 전문 연기자로 보일만큼 행진 연기가 자연스러웠다.
무대와 객석을 하나로 만든 연출의 힘
이번 공연을 보는 내내 극의 스토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101명의 어린이와 성인 합창단과 연기자 한명 한명 모두 제 역할을 해냈기 때문이다. 2막의 장난감을 사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혼내는 엄마들이 표현된 여성합창에서 위너오페라코러스의 여성 단원들은 수준 높은 오페라합창을 들려줬다. 연출자 엄숙정은 관객의 몰입을 빼앗기 쉬운 어린이 합창단의 노래와 연기 등 작은 디테일까지 조련해내며 관객의 집중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1막의 로돌포와 미미의 이중창 '오 귀여운 소녀(O soave fanciulla)'를 부르는장면의 독특한 연출이 돋보였다. 무대 뒤로 퇴장하며 고음을 내는 것으로 악보에 쓰여진 지시와 달리 두 주인공이 무대 중앙에 서서 고음으로 클라이막스 부분을 끝까지 노래한 연출은 관객들에게 신선한 경험이었다. 2막에서 무젯타가 마르첼로를 의식하며 아리아 '홀로 거닐때면 (Quando m’en vo)'을 부르는 장면에서 군중의 동작을 슬로우 모션으로 표현해 주인공들의 연기에 시선이 끌리게 하는 효과를 일으켰고 막이 내려올 때 객석과 가장 먼 무대 윗편으로 퇴장하던 어린이 합창단과 연기자들이 손을 흔들며 화답해 관객들의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3막에서 마르첼로와 무젯타가 싸우는 장면은 실제 연인들이 벌이는 귀여운 다툼의 장면으로 다가왔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사실주의 무대 미술이 그려낸 오페라
이번 공연의 무대 제작을 맡은 무대 디자이너 김현정은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19세기 파리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2막에서의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풍경, 라탱구의 카페 모뮈스, 3막에서의 쓸쓸한 플라타너스 숲과 주막, 1막과 4막의 다락방까지 모든 공간은 사실적이면서도 낭만적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무대는 관객으로 하여금 보헤미안들이 사랑했던 도시 파리를 생생히 느낄 수 있게 했다.특히,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의 라탱구는 파리를 소재로 특유의 서정적이고 따뜻한 그림을 그려내는 화가 미셸 들라크루아의 화풍과 닮아 있었다. 들라크루아의 작품 ‘파리에서의 크리스마스(Noel a Paris·2022)’와 아침 햇살 (Lumiere du matin·2021)’에서 느껴지는 감성이 고스란히 오페라 <라보엠>의 무대에 녹아 있었다.<라보엠>의 1막과 4막의 배경인 그림 도구와 벽난로가 있는 화가 마르첼로의 작업실은 들라크루아가 자신의 작업실을 그린 ‘흰 캔버스(La Toile blanche·2023)’처럼 큰 창문이 있다. 창문 넘어 우뚝 서 있는 파리의 상징 에펠탑은 다락방과 작업실 창문 모두에서 미세하게 볼 수 있다.파리에서 펼쳐지는 <라보엠> 속 보헤미안적 감수성이 표현된 무대디자인은 감탄과 함께 현실로 다가왔다. 현시대의 미술작품과 무대미술이 보여준 파리는 오페라 <라보엠>의 악보 지면에 각 장면의 배경을 써 준 푸치니에게 보내는 오마주였다.
지난 9월 오페라 <토스카>의 게오르규 헤프닝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서울시오페단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열악한 음향 조건과 광할한 공간의 제약을 넘어, 작품의 감동을 온전히 전달하는데 성공하며 제작 능력이 한 단계 도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울시오페라단이 오페라 <라보엠>에서 성악가, 연출가, 무대 미술로 써낸 드라마는 관객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조동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