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밸류업에 찬물을 끼얹는 회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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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주·공시制 악용 사례 잇따라“모처럼 주주 환원에 나서는 상장사가 많아졌는데, 이렇게 찬물을 끼얹는 게 말이 됩니까.”
꼼수 근절해야 증시 신뢰 회복
류은혁 증권부 기자
HL홀딩스 지분을 들고 있다는 한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는 얘기 도중 불쾌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최근 일부 상장사들의 ‘꼼수’성 행보로 주주들이 분노하는 상황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HL홀딩스는 그 논란의 한복판에 서 있다.이 회사가 3~4년 전 주주 친화책을 펼치겠다며 자사주 56만 주가량을 사들이겠다고 발표했을 때만 해도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주주들은 환호하고 주가는 급등했다. 하지만 최근 HL홀딩스는 주주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쳤다. 자사주 매입을 완료하자 이 중 16%만 소각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84%는 아직 설립조차 안 된 비영리 재단에 무상 증여하겠다고 했다. 자사주를 재단에 넘기면 사라졌던 의결권이 되살아난다. 주주가치 제고를 내걸었지만 사실상 회삿돈을 들여 최대주주의 지배력을 높이는 것이란 의혹이 나올 수밖에 없다. 소액주주는 물론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들까지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이수페타시스도 요즘 HL홀딩스 못지않게 논란의 대상이다. 이 회사는 얼마 전 시설투자와 유상증자 관련 이사회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해놓고는 시차를 두고 공시했다. 시설투자 관련 공시는 시간외 단일가 거래 시간에 내놨다. 주가도 올랐다. 그러고는 저녁 늦게 5500억원 규모 유상증자 등 악재성 공시를 쏟아냈다. 이미 당일 오전에 결정된 사안이었음에도 호재 공시는 매매 시간에 내놓고, 악재성 공시는 시장이 문을 닫은 뒤 은근슬쩍 발표한 것이다.
두 기업 모두 일단 증시에 호재가 될 만한 사안을 내놓고 대형 악재가 될 내용을 덮으려는 전형적인 꼼수 사례다. 법 위반 사항은 아니다. 한국거래소도 딱히 규제할 수단이 없다. 하지만 이 회사의 미래 가치와 경영진을 믿고 주식을 사들인 투자자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최근 밸류업 정책에 발맞춰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공시하고 그에 맞춰 실행하는 상장사가 늘고 있다. 이 회사들은 돈이 남아돌아서, 경영진이 마냥 순진해서 하는 게 아니다. 그게 ‘정도’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요즘 국내 증시 환경이 어려운 가운데 그나마 이들 기업이 국내 증시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한쪽에선 여전히 시장 제도를 악용하면서 발목을 잡는 기업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얼마 전 공개매수로 주가를 한껏 끌어올린 뒤 대규모 유상증자 공시를 내놨던 고려아연도 그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렇게 주가가 휘청이고, 주주들의 실망이 커질 때마다 ‘국장’을 등지는 투자자가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