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 [고두현의 문화살롱]

■ 삶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

우크라戰 사상자 100만 명 넘어
러 옛날식 인해전술에 더욱 처참

적십자 세워 생명 구한 앙리 뒤낭
사망률 40%→2% 낮춘 나이팅게일

난징 25만 명 살린 '중국판 쉰들러'
흥남 철수 때 10만 명 구한 현봉학

고두현 시인
하루 만에 6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1859년 솔페리노 전투. 이때의 참상을 본 스위스 사업가 장 앙리 뒤낭은 전시 부상자 구호를 위해 적십자를 창설했다. 화가 아돌프 이봉 작품 ‘솔페리노 전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000일이 지나면서 양국 사상자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러시아가 옛날식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통에 어이없는 죽음이 급증하고 있다. 팔다리를 잃는 등 심각한 부상을 입은 중상자가 전사자보다 훨씬 많다. 이 순간에도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병사들의 비명과 절규가 끊이지 않고 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포탄을 맞고 죽음을 직감한 안드레이의 입을 통해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죽고 싶지 않아. 난 나의 삶을 사랑해. 그리고 이 풀과 흙과 공기도…”라고 독백했다. 임시병원으로 후송돼 수술을 받던 안드레이는 극심한 고통에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뒤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감을 느꼈다. 자신의 행복을 앗아간 아나톨리가 한쪽 다리를 잃은 채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더욱 그랬다. 톨스토이는 이런 전쟁의 참상을 비추며 ‘생명만큼 소중한 게 어디 있으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고민했다.

첫 노벨평화상 받은 앙리 뒤낭

장 앙리 뒤낭
1859년 솔페리노에서 벌어진 전투 현장도 참혹했다. 그해 6월 24일, 이탈리아 북부 솔페리노에서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과 오스트리아군이 격돌했다. 양측 22만 군사가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는 바람에 하루 만에 사상자가 6만 명을 넘었다. 처참하기 짝이 없는 장면을 목격한 스위스 사업가 장 앙리 뒤낭은 자기 사업을 제쳐 두고 부상병 치료에 몰입했다. 인근 주민들로 민간인 구호반을 긴급히 조직한 그는 약품과 필수 자재를 자비로 조달해 가면서 야전병원을 구축하고 수많은 환자를 살렸다.

“아아! 일에 경험이 많고 자격을 갖춘 남녀 봉사원이 100여 명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이 경험을 담은 책 <솔페리노의 회상>을 출간하며 전시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 민간 국제기구 창설을 제안했고 마침내 1863년 국제적십자를 창립했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1901년 제1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톨스토이와 같은 해(1820)에 나고 같은 해(1910)에 죽은 그는 “크림 전쟁(1853) 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비롯한 자원 간호사들의 활약에 크게 감동했기에 ‘솔페리노의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나이팅게일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크림 전쟁에서 가장 안타까워한 것은 총 맞아 죽는 병사보다 부상을 치유하지 못하거나 위생 문제로 죽는 병사가 더 많다는 점이었다. 그는 전사자와 부상자에 관한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치료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사망률을 40%에서 2%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병사들은 밤마다 등을 켜고 환자를 돌보러 돌아다닌 그를 ‘등불을 든 여인’으로 추앙했고, 시인 롱펠로는 ‘오! 저 고통의 집 안에// 등불을 든 한 여인이 보이는구나/ 희미한 어둠 속을 지나가며// 방에서 방으로 스치는구나’(‘산타 필로메나’)라고 칭송했다.
오스카 쉰들러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사한 군인보다 살해된 민간인이 더 많았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끔찍했다. 이 광란의 시기에 독일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는 목숨을 걸고 강제수용소의 유대인 1200명을 사지에서 구했다. 이때 살아난 한 유대인이 종전 직후 자신의 금니를 녹여 쉰들러에게 선물한 반지에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는 탈무드 격언이 적혀 있었다. 이보다 더 생생한 경구가 또 있을까.

‘일본판 쉰들러’로 불리는 스기하라 지우네는 같은 시기에 사지로 내몰린 유대인 6000여 명의 생명을 구했다.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 영사였던 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친 유대인들에게 일본 통과 비자를 밤낮없이 발급했다. 소련과 일본 정부의 거듭된 퇴거 명령에 끝까지 버티면서 기차가 출발하는 순간까지도 서류를 작성해 창밖으로 던졌을 정도다.

"숨 쉬는 한 희망…살아 있으라"

난징 대학살 때는 더 큰 기적이 일어났다. 주인공은 ‘중국판 쉰들러’로 불리는 독일 기업가 욘 라베. 그는 침대 시트에 적십자 깃발을 그리고 벽을 둘러싸 ‘국제안전지대’를 설정한 뒤 이곳에 25만여 명을 피신시켰다. 당시 일본군에 희생된 사람이 30만 명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생명을 살린 것이다. 미국 여성 선교사 미니 보트린도 자신이 학장이던 진링여대를 안전지대로 만들어 여성과 고아 1만여 명을 살렸다.
현봉학
6·25전쟁 중 수많은 피란민을 살린 ‘의인 현봉학’은 어떤가. 미 10군 사령관 고문이던 그는 중공군에 포위된 미군 10만5000여 명의 철수작전이 한창인 흥남부두에서 울부짖는 피란민들을 보고 “저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눈물겨운 노력에 감동한 사령관은 군수물자를 바다에 버리고 피란민을 태웠다. 이렇게 해서 배 193척에 나눠 타고 목숨을 구한 피란민이 9만8000여 명에 달했다.

톨스토이는 포병 소위로 크림 전쟁에 참전했을 때 겪은 참상을 <세바스토폴 이야기>에 기록했다. 훗날 <전쟁과 평화>의 모티브가 된 이 소설에서 그는 피투성이 시체를 가득 실은 달구지와 사지가 잘린 채 바닥에 방치된 중상자들의 신음 등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전쟁의 무서운 진실을 보여줬다. 그러면서 인간의 사명은 남을 해치는 죽음의 골짜기가 아니라 타인에게 선을 베푸는 생명의 들판에서 빛을 발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고두현 시인
전쟁의 그늘은 깊고도 넓다. 피로 물든 들판은 참혹하다. 그러나 포연이 자욱한 전선에도 해가 뜨고 꽃이 핀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지구촌 곳곳의 전장에서 햇살 같고 꽃잎 같은 ‘생명의 기적’이 잇달아 일어나길 간구한다. 고대 그리스 시인 테오크리토스는 시 ‘목가’에서 “삶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고 했다. 철학자 키케로도 “숨을 쉬는 한 희망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전장의 젊은이들이여, 명령하건대 부디 살아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