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 원작 작가…"정년이가 계속하라고 등 두드려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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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인기 드라마 '정년이' 원작 작가 서이레"'정년이'한테 말해주고 싶어요. 고생 많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웹툰 기획과 스토리 담당하는 글작가
그림 그릴 줄은 몰라
대학 시절 여성 국극 논문 읽고 영감 받아
부족한 자료 찾아 전국 도서관 뒤져
어머니도 '정년이' 보고 처음 인정해줘
웹툰은 장르와 상상력 제한이 덜해
잘못된 관습에 균열 내는 작가 되고파
첫 산문집 출간
얼마 전 종영한 인기 드라마 '정년이'의 원작 웹툰을 만든 서이레 작가(32·사진)는 이같이 말했다. 서 작가는 웹툰 작가지만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 웹툰 기획과 스토리를 담당하는 글 작가라서다. 그는 "'정년이'는 내게 '계속 이런 이야기를 써도 괜찮다'라며 등을 두드려준 작품"이라고 털어놨다. 최근 첫 산문집 <미안해 널 미워해>를 낸 서 작가를 27일 서울 중림동에서 만났다.드라마 속 퀴어 로맨스 삭제는 아쉬워
1950년대 열성 팬을 몰고 다닌 여성 국극단을 소재로 한 웹툰 '정년이'는 서 작가가 글을 쓰고 나몬 그림작가가 그림을 그리며 2019년부터 4년간 연재됐다. 국극 배우가 되고 싶은 목포 소녀 정년이와 국극 단원들의 성장기, 사랑 등이 담겼다. 웹툰 연재 시작부터 큰 인기를 끈 이 작품은 부천만화대상과 웹툰 최초 양성평등문화콘텐츠상 등을 받았다. 지난해 3월 국립창극단에 의해 창극으로 만들어져 전 좌석을 매진시켰고, 최근 배우 김태리 주연의 드라마로 만들어져 최고 시청률 16.5%를 기록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서 작가는 학부 시절 현대문학사 수업에서 우연히 여성국극에 대한 논문을 읽고 '정년이'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그는 "자료가 많지 않아 전국 곳곳의 도서관을 뒤지고 일본 다카라즈카 극단(여성으로만 구성된 일본의 가극단) 공연까지 직접 보러 가면서 작품을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정년이'를 처음 기획하고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작품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을 거라 생각한 이는 드물었다. 서 작가 본인조차 예상치 못했다고. 여성 인물들만 등장하는 이야기에 동성애 서사, 국극이란 낯선 소재 등이 기존의 흥행 공식과는 거리가 멀어서다. 서 작가는 "소수자의 목소리가 담긴 작품을 쓰고 싶다"며 "'정년이'가 받은 많은 사랑과 관심은 이런 작품을 앞으로 계속 써도 괜찮다는 응원과 같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어 "맏딸이 웹툰 작가 하는 걸 마땅찮아 하던 어머니도 '정년이'를 보고 '이렇게 남들한테 사랑과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하는 줄 몰랐다'며 처음 인정해줬다"며 "내적 지지와 외적 지지를 모두 얻을 수 있게 해준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드라마에선 배우 문소리와 정은채의 연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서 작가는 "웹툰은 소리나 춤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드라마에서 상상하던 모습이 펼쳐질 때 짜릿했다"며 "극중 배우 문소리가 판소리 '심청가' 속 '추월만정'을 열창하는 장면이나, 배우 정은채가 국극 '자명고' 무대에서 부채를 펼치는 장면에선 소름이 돋았을 정도"라고 강조했다. 드라마 '정년이'는 원작의 핵심 서사였던 퀴어(성소수자) 로맨스가 삭제돼 논란이 되기도 했다. 서 작가는 "물론 아쉽다"면서도 "다른 장르로 만들면서 제작진 나름대로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존중한다"고 밝혔다.
작가에게 웹툰은 매력적인 장르서 작가는 이번 산문집을 통해 처음으로 픽션이 아닌 본인의 진솔한 이야기를 썼다. 어릴 때부터 만화를 사랑해서 고교 시절 만화 동아리에도 들었지만 그림 그리는 재주는 부족했다. 대신 재미있는 글을 써서 그림 잘 그리는 친구들에게 찾아가 같이 만화를 완성해보자고 꼬드겼다. 그때부터 그림 작가와 협업이 필수인 웹툰 스토리 작가의 맛을 본 셈이다.서 작가는 "웹툰이란 장르는 '글쟁이'에게 매력적"이라며 "소설보다 더 다양한 독자를 만날 수 있고, 영화나 드라마 대본과 비교해 장르나 상상력의 제한이 덜하다는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내가 쓴 글이 그림 작가의 손에 의해 곧바로 시각화된다는 것도 굉장히 특별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서 작가에게 '정년이'를 비롯한 모든 작품은 애증의 대상이다. 산문집의 제목에서 미안해 하고 미워하는 대상은 바로 본인의 글이라고. 서 작가는 "내 작품과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동시에 완성된 원고를 보면 다시 보기 힘들 정도로 부끄럽고 자괴감이 들곤 한다"며 "좀 더 잘하고 싶은 마음과 작품에 투영된 나의 내밀한 모습을 발견하면서 복합적인 감정이 몰려온다"고 말했다.
"내 작품을 다시 보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워 하면서도, 신점까지 보러 가면서 이 일을 놓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게 참 모순적이죠. 그만큼 글을, 웹툰을 사랑해서인 듯해요." 서 작가는 이번 책에서 "균열을 내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썼다.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고 아파할 줄 알면서, 잘못된 관습과 고정관념에 금이 갈 때까지 돌을 두드리는 글이, 그가 쓰고 싶은 글이다. 서 작가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여태 내가 가지고 있던 우주가 부서지는 경험을 하면서 경외심이 들었고, 그런 경험을 하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다"며 "차기작은 미등록 이주 아동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